brunch

책을 읽겠다고 말해버린 날

그 말이 나보다 먼저 책을 덮어버렸다

by 피터의펜

요즘 들어 부쩍 책이 읽고 싶어 졌다. 그래서 결국, 그 말부터 꺼내버렸다.


"오늘 책 한 권 읽겠어."


별것 아닌 말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이런 별것 아닌 말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해놓고 나니 왠지 진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이 생겼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내 어깨에 이상한 숙제를 얹어버린 셈이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에 잠시 방영되었던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예능이 떠올랐다. 평소 챙겨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채널을 돌리다 보면 한두 번쯤 멈추게 되는 묘한 힘이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책을 소개하고, 읽기를 권장하고,

재미도 있고, 은근 감동도 있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책을 얼마나 안 읽길래 저런 프로그램까지 나오지?" 하고 웃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요즘 내 얘기였다.


어릴 땐 목적도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만화든 그냥 손에 잡히면 읽었다. 그냥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좋았던 시절이었다.


큰돈도 없던 때라 책을 보고 싶으면 서점에 가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놓인 책을 시간 허락하는 만큼 읽다 나오곤 했다.


그때 읽던 책들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어쩌면 그 시절에 내가 책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던 건 그 어떤 목적 없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에게는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너무 많아졌다.


일단 책은 양장본이어야 한다. 손에 딱 붙는 무게감, 페이지가 균형 있게 쫙 펼쳐지는 느낌 그리고 그 두툼한 하드커버가 주는 안정감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으로 만들어진 '가름끈'이 꼭 있어야 한다. 책이 "언제든 쉬어도 돼" 하고 내게 말해주는 듯해서 위로가 된다.


내지 색깔도 중요하다. 미색도, 크림색도 좋지만 나는 순백색을 좋아한다. 새까맣게 인쇄된 글자와 대비가 선명해야 한다. 내지의 재질도 중요하다. 광택지처럼 미끄러우면 안 되고 또 갱지처럼 거칠어도 안 된다. 딱 A4 모조지 같은 촉감이어야 한다.


이쯤 되면 책도 책이지만

내가 책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 많다.


그러니 책을 소홀히 한 건 온라인 시대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내가 까다로워진 거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양장본, 가름끈, 내지 재질, 색상... 독서 조건이 완벽했다. 커피도 한 잔 준비해 놓았다. "이번엔 진짜 읽겠다"는 의욕이 충만했다.


그리고 책을 펼쳤다.


몇 페이지 읽었더라.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책이 나를 읽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자꾸 고개가 떨어지고 단어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문장이 마치 욕실의 뿌연 거울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커피를 들이마셔도 소용없고 자세를 바꿔도 졸음을 막을 수 없어 결국 책을 덮어버렸다.


아, 이거 데자뷔다.


예전에 TV에서 어떤 유명 배우가 책을 펼치자마자 코까지 골며 잠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땐 웃었는데 지금 나는 그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책을 고를 때 가름끈이 어떻고, 종이 색이 어떻고, 양장본이 어떻고, 커피가 어떻고 하는 수많은 '조건'을 붙였지만 정작 읽지 못한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냥... 나였다. 책이 아니라, 커피가 아니라, 핸드폰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오늘 책 한 권 읽겠다"는 그 말이 문제였다.


그 말이 나를 쓸데없이 괜히 긴장시키고, 책 앞에서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읽기 전부터 지쳐버린 이유가 거기 있었다.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오늘 책 한 권 읽겠다"는 말은 생각보다 무겁고

때로는 졸음보다 강하다.


책이 나를 재운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걸어둔 말이

나를 먼저 재워버렸다.


독서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이 꺼내질 때 시작되는 거라는 걸

오늘에서야 조금 알았다.

keyword
이전 18화나는 왜 오늘 1시간 20분을 뛰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