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필요한 다짐이 불러온 필연의 아침
지난 건강검진에서 혈압은 두 번 측정 만에 겨우 통과했고, 마지막 문진 자리에서 결국 그 말을 들었다.
"유산소를 좀 꾸준히 하세요. 심혈관 질환 위험이 줄어듭니다."
그 말인즉슨,
"당장 밖에 나가서 제발 좀 뛰세요."
사실 누가 몰라서 못하나.
모두 아는 걸 못하니까 사람이 사는 거다.
말처럼 쉬웠으면 이 세상은 이미 마라토너 천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엔 자신감이 넘쳤다.
금요일 저녁의 묘한 들뜸 때문인지, 피곤함도 하나도 없고, 한동안 콘푸로스트는 먹지도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호랑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서 결국 큰소리를 딱 내뱉었다.
"내일은 새벽 6시에 운동 나갈 거야."
아이들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정말? 가능하겠어?"
"그럼."
......
......
......
항상 문제는 이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알람이 울렸다.
눈을 떴다.
그리고 동시에 후회했다.
'내가 어제 왜 그딴 말을...?'
그 순간 집안은 너무 조용했다. 아이들은 꿈나라 어딘가에서 행복한 모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내 알람 때문에 그 꿈을 끊어버린 건 아닐까 싶어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아니, 아무리 건강이 중요해도 애들 꿈을 깨워가며까지 운동할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다시 눕기엔 어제 큰소리치던 나 자신이 너무 얄밉다.
말 한마디 때문에 다시 자지도, 그렇다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묘한 구속 상태가 만들어졌다.
찬물로 얼굴을 씻고 세면대 앞에서 양치하면서 나갈까 말까를 정말 스무 번은 고민했다. 아니다, 스무 번은 좀 적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골백번은 더 고민했다.
운동복 앞에 서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입을까?
말까?
그냥 이불로 돌아갈까?”
그런데 이놈의 운동복이 또 문제였다.
피죤 향기가 어찌나 강하게 배어 있는지, 입지도 않았는데 막 '가보자!' 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세탁이 이렇게 잘 되는 날은 왜 하필 오늘인가.
그때 문득 예전에 유튜브에서 들었던 강연이 떠올랐다.
"잠은 보약입니다."
아... 정말.
왜 하필 새벽 6시에 그 말이 떠오르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갈까 잠깐 고민했는데 그 순간, 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오늘은 나가야 한다."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붙는다. 그 순간만큼은 정신적으로 아주 많이 울었다. 우리 집이 넓은 편도 아닌데 오늘따라 현관까지 오는 길이 유난히 멀다.
게다가 전날 밤, 날씨 앱에서는
"내일은 오늘보다 5도 높아요"라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내가 바보였다. 사람 말은 쉽게 안 믿으면서, 어제는 또 날씨 앱을 왜 그렇게 믿었을까?
그래도 별 수 있나.
여기까지 왔으니 나가야지.
문을 여는 순간..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정말로 폐 속이 얼어붙는 느낌이다.
5도 더 따뜻하다더니,
지금 체감기온은 영하 50도쯤 같았다.
다시 들어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미 신발까지 신고 나온 이상 돌아갈 수 없었다.
말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이제 와서 취소하기엔 내가 너무 멀리 와버린 거다.
원래 30~40분만 뛰다 들어오려 했다. 그게 가장 건강하게 사는 길이다. 조금씩, 꾸준히 하는 운동.
그런데 오늘은 1시간 20분을 달렸다.
불필요한 말 한마디로
불필요하게 일찍 일어났고
불필요하게 멀리 나왔고
불필요하게 오래 뛰었다.
약간은 억울했다.
그래서 더 뛰었다.
달리다가 괜히 이런 결심도 했다.
'내일 운동도 오늘 몰아서 해버리자.'
오늘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꽁꽁 싸매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은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진짜 늦잠 잘 거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실 아무도 나한테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아이들도, 아내도, 건강검진 의사도.
그냥 나 혼자 나를 이렇게 몰아붙인 거다.
어제 그 한마디만 안 했으면 나는 지금쯤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었을 텐데. 그야말로 보약 중의 보약을 먹고 있었을 텐데.
말이라는 게 참 그렇다.
대충 뱉어도 될 때가 있지만,
절대 뱉으면 안 되는 때가 있다.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새벽 6시는 우리가 던진 말들이
하나하나 책임을 물어오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늘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조금 더 춥고,
조금 더 멀고,
조금 더 오래 뛰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