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이제는 지난 일이 되어버린, 문득문득 떠오르기는 하지만 과거로 묻어 둔 아픈 시간들이 있다.
난임의 시간과 유산을 반복하던 3년의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이라 쓰여지지만 끝을 모르던, 까무룩 한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그 시간들.
마지막으로 유산을 했던 2017년 12월. 그때가 떠올랐다.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의 슬픈 메시지를 받으면서부터였다. 결코 나의 일이 아니지만 그때의 하루하루를 너무도 잘 알기에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아팠다.
어떤 말도 힘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때의 나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고, 가장 가까운 친구와도 하물며 엄마 아빠와도 더욱이 내 옆을 묵묵히 지키는 남편에게도 말을 아꼈다. 하루 또 하루가 꾸역꾸역 흘러가고 시간은 끈적이게 나를 붙들고 아무리 노력해도 웃을 수 없었던 시간들.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혼자 있는 것 같았고, 씹어서 삼킨 밥알이 돌덩이보다 거칠게 느껴지던 날들. 가슴에 큰 돌 하나 짊어지고 살던 그때, 제발 오늘 하루가 지나가버리기를 이 시간이 그저 흘러가기를 바라며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해나갔다. 적막하다 못해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를 만큼 고요하던 집에서 나는 글을 섰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서 핸드폰을 바꿀 때마다 나의 메모장은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잡다한 것을 기록하고, 별 것 아닌 것들을 수집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모아 두던 내가 사진첩보다 더 아끼는 나의 메모장. 그곳에 나는 글을 섰다. 그 힘든 시간 어떻게 이겨냈냐고 물으면 나는 말했다. 섰다고.
거창한 글은 쓸 수도 없었고, 쓸 줄도 몰랐다. 그저 나를 괴롭히는 순간을 기록했다. 아이가 태동을 하지 않던 그날 아침과 아이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음을 알았던 그 순간의 나, 아이를 보내던 그 시간, 남편과 부둥켜안고 울던 순간들. 막연히 떠오르는 나쁜 생각들을 기록했다. 혼자 먼길 가는 아이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 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기록하고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만 가지의 슬픈 생각들을 적어 내려갔다.
밥을 먹다가도 썼다. 울다가도 쓰고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썼다. 무조건 썼다.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썼다. 쓰지 않으면 그 생각이 몇 날 며칠이고 나를 괴롭혔다. 지나간 생각은 매일 다시 돌아오고, 지나간 순간이 다시 떠오르고, 원망을 하고 또 하고, 울고 또 울고. 그만 하고 싶어서 그래서 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보내던 그때. 떠오를 때마다 쓰는 것은 내가 하는 유일한 행위였다.
쓰고 나면 또다른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미 쓴 생각은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쓰면서 대부분은 울었지만 신기하게도 쓰고 나면, 쓰면서 한바탕 울고 나면 개운했다. '더 이상 너는 날 괴롭히지 마.' 하고 단단히 묶어 둔 것 같았다. 아주 단단히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그렇게 꽁꽁 묶어 둔 순간순간들, 매 시와 매 때.
'쓰기'는 내게 아름답고 고상한 무언가가 아니라 처절하고 간절한, 그리고 애달픈 치유의 시간이었다.
주체하지 못할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나는 쓰라고 말해주고 싶다. 쓴 글의 내용이 너무 괴로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면 쓰고 나서 그 종이를 찢어 버려도 된다고. 씀으로 영영 그 기억과 그 시간과의 안녕을 고하라고. 내게 자신의 슬픔을 공유한 그녀에게 나는 쓰라고 했다. 아이에게도 쓰고 나에게도 쓰고, 원망도 쓰고 미움도 쓰고 화도 쓰고 슬픔도 쓰고 다 쓰고 나면 감사도 쓰게 된다는 걸 알기에.
나는 절망하는 그녀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다. 그 시간을, 그 상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그녀가 아닌 그때의 나에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햇볕을 보라고, 너무 많이 아프지 말라고, 분명 더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시간을 건너 나에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때 그 시간을 여전히 보내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나에게 '쓰기'는 여전히 그러하다. 아이와의 다툼을 기록하고, 어느 날 밤은 고해성사를 쓰고, 어떤 날은 알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쓰고 또 어느 날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딸을 향한 세레나데를 쓴다. '쓰기'로 나를 비워내고, '씀'으로 나를 채워간다.
아이를 낳으면 다 끝날 줄 알았던 그 처절한 ‘씀’이 아이를 낳아 육아의 숲을 거닐며 그때와는 또 다른 처절함이 또 다른 애틋함이 나를 다시 ‘씀’으로 안내한다.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시작되는 인생의 두 번째 여정의 문을 열자마자 넘어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멍들면서 나는 매일 밤을 울었다. 때로는 몸이 너무 고돼서 때로는 미안해서 때로는 외로워서 또 때로는 고마워서 눈물을 훔쳐야 했다. 이토록 애틋하고 이토록 수고로운 육아의 숲에서 아이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나 아이를 제대로 길러 보겠다는 의지나 책임감 같은 것들은 너무도 무용했다. 그 많은 교육서적이 내게 준 지식보다는 지혜가 필요했고 수많은 육아 스킬보다는 쓰디쓰다는 인내의 열매가 더욱 간절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실은 아이를 아름답게 길러내는 데에는 그저 한 생명을 오롯이 사랑하는 마음 한 방울과 엄마의 빈틈 그리고 자연이 주는 햇살 한 줌이면 충분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아이의 교육을 맡은 것은 자연이며 자연이 아이를 상장시키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부모의 임무라는 몬테소리의 여사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날들의 연속.
아이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인격체이고, 고유함을 가진 인간 그 자체이다. 다만 어떠한 습관도 가지지 않은 상태의 아이를 부모는 좋은 습관을 물려줌으로써 아이의 앞날을 응원하는 것이리라. 그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것이야 말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며 습관을 상속하는 방법은 아마도 아이의 본보기가 되는 것뿐일 것이다.
육아의 숲에서 숨죽여 눈물을 흘려야 했던 수많은 밤들을 보내며 나는 다시 ‘쓰기’로 했다. 너무도 괴롭고 혼란스러운 마음과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꾸짖기 위해 쓰고, 어떤 날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너무도 애틋한 이 감정의 조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붙들어두기 위해 쓴다. 씀으로 기억하고 씀으로 깨닫는다.
그렇게 쓰여진 글들. 이토록 애틋한 육아의 숲에서 엄마가 쓰는 밤 편지. 어쩌면 아이에게, 어쩌면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그러나 어쩌면 나에게 보내는, 어쩌면 일기 어쩌면 편지. 엄마의 밤 편지.
이토록 애틋한 육아의 숲에서 나는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