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이가 아닌 '나'를 돌보세요.
누군가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는 남편 친구의 아내가 출산을 했단다. 나와 똑같진 않아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이라 축하 메시지를 신경 써서 꼼꼼히 적었다. 그러다 문득, 그때의 우리가 떠올랐다. 나의 작고 작은 아이를 만났을 그때가.
기억은 고작 일 년 전일인데도 기억 회로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가물가물하다. 이상하게도 딱 그 맘 때의 기억은 언제나 흐릿하고 몽롱하며 아릿하다.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졸음을 달고 살았던 데다가 출산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몸은 아침이면 여기저기 구석구석이 아파왔다. 출산을 한 달은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밤 깊은 새벽녘에 몽롱한 정신으로 거실에 앉아 유축을 했다. 잠옷 아래로 드러난 발목과 종아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가끔은 답답하면 꼭 신으라던 수면 양말도 벗은 채 유축을 했다. 그러다 어른들이 말하는 '바람'이 들었다. 몇 달간 종아리 뒤쪽이 시큰거렸고, 발이 시려서 맨발로는 마룻바닥을 내딛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잠깐 방심한 틈을 타 순식간에 그리 되어버렸다. 시간 간격을 지켜 유축을 하느라 손목은 늘 욱신욱신했고, 서너 시간마다 분유를 타고 수유를 하고 아이를 다시 재우기를 반복하느라 숙면이라곤 구경도 못했던 고단하고 고단한 시절이다.
그래서일까, 그 시간은 마치 꿈결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각하면 꿈을 꾼 것처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뜬 기억. 눈을 뜨면 작고 작은아이가 옆에서 잠을 자고, 소리 내 울고, 냄새도 좋은 똥을 한가득 싸고,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주변을 빤히 본다. 잠이 든 아이의 눈가를 손을 발을 이마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그 시절, 우리의 호시절.
언제나 잠이 오는 몽롱한 정신으로 수도 없이 젖을 물렸던 순간으로 그득한 그때의 밤과 낮과 새벽. 우리들만의 그 농밀했던 시간. 다 큰 어른 둘이서 조그마한 아이 하나를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수많은 날들. 작은 아이가 우리 품에서 어찌 될까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시간들. 그러면서도 행복이 마음 곳곳과 집안 틈새로 흘러넘쳐 찰랑거리던 그 시절, 우리의 호시절.
나는 그때의 우리를 떠올리며, 축하 메시지 말미에 꼭 몸조리에 신경을 쓰라고 썼다. 여자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니 신경 써서 잘해야 한다고, 앞으로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지금만은 꼭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쓰라고.
아이를 품기 위해 그리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또 그 아이를 지구별에서 만나기 위해 보낸 기다림과 인내의 모든 시간을 존경한다. 그 시간은 오로지 ‘엄마’라는 이름을 선택한 여자가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기에 누구도 대신해주거나 거들어 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했기에 꼭 지금 이 시간만큼은 '나'를 위해 쓰라고.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메시지를 정성스레 마무리하고서 아이의 신생아 시절의 사진을 밤이 늦도록 다시 보았다. 사진에서도 아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연약하지만 강렬했던 그 생명력이 오롯이 전해진다.
조리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던 설레던 날, 서툰 두 어른이 아기를 목욕시키느라 진땀을 뺐던 날, 처음으로 손톱을 깎으며 손을 벌벌 떨던 그때, 기저귀를 갈면서 허둥대던 우리, 모유를 거부하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며 괴로워했던 나, 잠결에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보고 행복했던 우리 둘. 흐릿하다고 몽롱하다고 꿈결 같다고 하면서도 흐릿한 채로 두기엔 너무 소중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참 행복했네 우리’하고 시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보는 그때의 시간은 '지금의 우리'를 더욱 견고하고 소중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를 더욱 사랑하자고 다짐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지금이 우리의 호시절일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