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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의봄 Jul 21. 2022

결혼 생활의 기쁨과 슬픔(4화-설정은)

당신의 결혼생활은 안녕하신가요?




  토요일 오전 열 시, 다음 주에 1차 고사를 치르는 중학교 2학년 아들은 학원에 갔고, 초등학교 5학년 딸은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고 들어오겠다며 나갔다. 집에는 정은과 은우만 남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어서 빨리 자라서 각자 자기 친구들과 만나 놀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둘째까지 취학한 이후, 시간이 쏜살처럼 달렸고 은우는 우리가 벌써 노년의 부부처럼 이렇게 여유가 생겼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제 오 년 지나면 우성이가 스무 살 되는 거잖아? 엊그제 아기였는데, 아기 키우기 힘들다고, 어서어서 크길 바라며 징징거린 게 분명 얼마 전이었는데, 이럴 수 있어? 시간 가는 게 무섭다.”

  정은이 말했다.

  “자기 마흔여섯이야. 내일모레면 사십 대 후반.”

  정은은 눈썹을 까딱거리며 에너지를 눈에 모았다.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은우 얼굴을 보며 정은은 어린아이에게 잔뜩 겁을 주는 어른의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막 사십 대 중반 들어와서 좋겠네, 마흔셋 동생. 누나 갱년기 오면 힘들게 할 줄 알아. 조심해.”

  “눼눼 조심하겠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은우는 주먹 쥔 오른손을 엉덩이 뒤에서 앞으로 가져오더니 정은의 얼굴 앞에 펼쳤다. 어릴 땐 여동생 은수가 당했고, 결혼 후에는 정은과 아들 우성이 자주 당하는 장난이었다. 아들 우성은 제 아빠가 하는 대로 여동생 하은에게 같은 장난을 치곤 한다.

  “윽! 지독해! 화장실에나 가!”

  은우는 휴대폰을 챙겨 안방 화장실로 도망갔다. 가는 길에 한 번 뒤돌아서 아내 정은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는 느끼한 센스를 놓치지 않고 발휘했다.








  두 사람은 작은 광고회사에서 만났다. 정은은 사 년 차 웹디자이너였고, 은우는 이제 막 사진과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은우가 제품 사진을 찍으면 정은이 사진을 다듬어 제품 포장 상자나 홍보 브로슈어 등을 만들었다. 은우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회사 막내인 게 무색할 만큼 아무에게나(대표에게도) 농담을 잘 던졌고, 정은이 누구보다 재치 있게 받아쳤다. 탁구 치듯 농담과 장난을 주고받다가 어느새 사랑의 감정이 핑퐁 했다. 서른을 먼저 앞둔 정은이 결혼을 제안했다. 오랜 타지 생활 때문에 따뜻한 가정-자취방이 아닌, 부모님과 살던 그런 집-이 그리웠던 은우는 아직 사회에서 말하는 혼령 기는 아니지만 조금 일찍 결혼해도 좋을 것 같았다. 걸리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은우는 이제 겨우 직장 생활 2년 차였다. 모아둔 돈이 별로 없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아직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여동생의 뒷바라지를 하고 계셨고, 스물여섯인 은우가 벌써 결혼하겠다며 신붓감을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은우는, 아들이 신혼집을 마련하는 데 내어줄 돈이 당장 없다는 은우 부모님 말씀을 그대로 예비 신부에게 전했다. 그동안 자신이 모아둔 통장을 열어 보여주었다. 정은은 자신이 모아둔 돈이 얼마인지 떠올려 보았다. 결혼식에 드는 돈을 최소화하고 둘이 모아둔 돈을 전부 전셋집 구하는 데 쓰기로 했다.



  “우리 얼마 전에 동남아로 배낭여행 한 달 다녀왔잖아. 그러니까 신혼여행은 국내로 가자. 강원도 리조트에 머물면서 며칠간 보드를 실컷 타는 거야. 예물 이런 것도 다 생략하자. 허례허식만 안 해도 결혼 준비 비용이 확 줄어 들 거야. 결혼사진도 스튜디오에서 비싼 돈 주고 할 필요 있을까? 자기 대학 동기 한 명 섭외해서 야외에서 찍자. 외국 잡지에서 본 적 있는데, 신랑 신부가 평상복과 비슷한 느낌의 옷을 입고 ‘결혼사진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약간의 소품을 활용해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참 세련되고 예뻐 보였어.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을 것 같았어. 우리도 그렇게 찍자. 분명히 십 년쯤 지나면 웨딩 사진 트렌드도 바뀔 거야. 두고 보라고. 우리 웨딩 사진이 시대를 앞서 간 세련된 사진이 될 거라고.”





 



  두 사람은 용인에 신혼집을 구했다.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 되고 있어서 깨끗하고 쾌적한 아파트 단지의 오층이었다. 정은은 착하고 자상하고 다정하며 성실한 은우가 좋았다. 가진 걸 다 잃어도 사라지지 않을, 상대방의 본질만 보고 소박하게 시작했다.

  정은의 어린 신랑은 아내 친구의 남편들-금수저 출신 형님,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 기반이 잡힌 형님 등-을 보며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 세상 물정에 눈을 떴다. 밤낮으로 부동산, 주식 등 재테크 공부를 했다. 싹싹하게 회사 생활을 잘했더니 먼저 이직한 사람들의 추천으로 조건이 좋은 회사로 스카우트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십 년이 될 때까지 일이 년에 한 번 꼴로 부지런히 이사를 다녔다. 이사할 때마다 조금씩 삶의 질이 높아졌다. 조금 더 신도시로, 조금 더 넓은 평수로, 조금 더 새 집으로. 인 서울은 못했지만, 지역에서 집값을 선도하는 대장 아파트 입성에 성공했다. 부모의 좋은 점만 빼닮은 아들, 딸은 빼어난 미모와 좋은 인성으로 어딜 가나 주목받았다. 정은은, 아이 둘을 보고 있으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시댁은 멀고, 친정은 가까운 점도 좋았다. 은우는 아이를 돌봐주는 장인, 장모님을 배려하며 섬세하게 모셨다. 친정 부모님의 도움으로 아이 둘을 맡겨 놓고 정은도 계속 회사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재산을 조금씩 불릴 수 있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더니 하늘이 복을 내린 걸까. 팔리지 않을 것 같던 시부모님의 시골 땅이 보상을 받게 되었다. 문화 유적지로 지정된 이유였다.

  “너희 결혼할 때 도와줬으면 좋았을 텐데, 늦었지만 이걸로 대출 좀 갚거라.”

  결혼할 때부터 몇 억씩 도움을 받아 서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정은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장점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상하고 다정하며 친구 남편들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남편이 있어서 감사했다. 아이 둘과 양가 부모님이 건강해 감사했다. 사는 부동산마다 가격이 오르는 것도 감사했다.     



  은우가 증여세와 취득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작은 상가를 샀다. 경매로 나온 매물이었다.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는지 2차까지 유찰되어 낙찰가가 감정가의 50%선까지 떨어졌다. 오랜 공부로 부동산 투자의 감을 익힌 은우에게 하늘의 계시처럼 목돈이 들어왔고, 은우는 과감하게 경매에 입찰했다. 약간의 돈을 들여 수리를 하고 온라인 홍보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부동산 중개 소장님께 매물을 내놓았다. 기대보다 일찍 세입자를 구했다.

  “월세 받아서 양가 부모님께 용돈 드리는 거 어때?”

  그래. 월세 그거. 받으면 우리 생활이 좀 더 여유로워지겠지만, 지금까지도 그거 없이 잘 살았잖아. 내가 참 남편 하나는 참 잘 만났어. 라고 정은은 생각했다.







  “자기야 오늘 좀 늦겠는데?”

  “늘 늦으면서 새삼스럽게 뭘. 오늘은 무슨 일로?”

  “아, 형식이가 요즘 힘들어해서. 이직할까 고민하는 것 같더라. 저녁 사주면서 얘기 좀 나눌까 해.”

  “그래 알겠어.”

  은우는 회사 내 홍반장 같은 사람이다. 사내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 꼭 은우가 있다. 오지랖이 태평양이다. 은우가 제 발로 찾아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불러서 그 자리에 간다. 홍반장이라고 하기에 40%쯤 부족하다. 은우는 전자제품 사용법을 터득한다든가 전기 제품을 고치는 것(형광등을 교체하는 단순한 일 포함), 각종 제품 조립 같은 일에는 젬병이다. 집에서 이런 일을 정은이 도맡고 있다. 은우는 ‘입’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나서서 뚝딱뚝딱 해결한다. 학창 시절부터 싸움이 나면 친구들이 은우를 불렀다. ‘입 터는 능력’을 타고난 듯하다. 정은은, 자신의 휴식 시간을 포기하고 남들을 위해 시간을 쓰는 은우가 못마땅한 적도 있었다. 작업용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둔 ‘불만보다 감사를’이라는 글귀를 보며 정은은 은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했다.

  ‘그래 봐야 자기가 피곤하지, 내가 피곤한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

  잔소리를 해봤자 돌아오는 건 싸움뿐이라는 지혜를 신혼 초에 터득한 덕분에 두 사람은 여태 큰 싸움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세종에 있는 아가씨 집에 갔을 때였다. 아가씨의 남편이자 우성이와 하은이의 고모부가 우성이에게 물었다.

  “고모랑 고모부 중에 누가 더 문제인 것 같아?”

  우성은 망설임 없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당연히 고모부지. 고모부는 다른 사람 말을 안 들어. 내가 얘기해도 몇 번 만에 알아듣잖아.”

  “우성이 아빠는 어때?”

  “우리 아빠? 우리 아빠는 잘해. 엄마 말 잘 들어. 고모부만 잘하면 돼.”

  고모부는 절망했다. 세종에 내려올 때마다 친구처럼 잘해주는 고모부 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 조카가 팩트 폭격을 날린 것이다. 아이 눈에 엄마, 아빠가 그렇게 보였다니, 정은은 뿌듯했다.    






  은우는 안팎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정은이 이야기하면 답을 찾기 전에 상대의 마음에 공감부터 해준다.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은 힘든 일이 생기면 정은은 남편부터 찾는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절반으로 줄어들고, 즐거운 감정은 배가 된다. 은우가 홍반장이 된 것은 타고난 그의 기질 때문이다. 기질이 정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발휘되는 것이다.


  은우는 정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정은이 가만 생각해보니 자신의 생각을 은우에게 거부당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경우도 있었을 텐데, 한쪽이 굽히고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뾰족하게 내세우지 않는 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은우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은우와 정은은 건강한 취미 생활을 함께 하고 있다. 주말이면 함께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을 한다. 결혼 10주년 때에는 부부 바디 프로필 촬영도 했다. 친구의 남편들은 배가 무럭무럭 불러오는데, 초콜릿 복근을 가진 남편과 십 일 자 복근의 자신이 다정히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며 여러 사람이 부러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정은은 남편과 음식 취향도 잘 맞았다. 육고기보다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것, 단 커피는 질색인 것(특히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취향이다), 흰쌀밥보다는 잡곡밥을, 맥주보다는 소주를, 닭다리보다는 퍽퍽한 가슴살을 좋아하는 것 등 더 나열하려면 할 수 있다.


  정은이 재택근무를 하며 교류하는 사람이 전보다 줄어든 와중에,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약 3년 동안 유일하게 만나온 친구가 남편이었다. 정은은 주말이면 남편과 아이 둘과 함께 주말 농장에 갔다. 직접 농사지은 식재료로 건강한 한 끼를 만들어 먹는 게 주말의 가장 중요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친구를 몇 년 간 만나지 않아도 아쉽지 않았다. 남편이 정은의 영혼을 가득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남편과 같이 놀 때, 남편과 얘기를 나눌 때 가장 즐거운 정은이었다.

 







  은우의 마흔세 번째 생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곧 퇴근할 은우의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우성이는 북한 군인도 두려워한다는 중2인 것치고 엄마한테 다정한 편이다. 아빠 생일 파티 준비를 하며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배려하는 아들 모습에서 은우가 보인다. 정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은우에게 편지를 썼다.




  - 사랑하는 자기야. 벌써 열여덟 번의 생일을 함께 했네. 조금만 더 있으면 자기가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보다 나와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아질 텐데. 우리 50살, 60살... 100살까지 베프로 살자.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베프가 집에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설마 나만 베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사랑해. 생일 축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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