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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의봄 Aug 09. 2022

결혼 생활의 기쁨과 슬픔(9화-곽아란)

당신의 결혼 생활은 안녕하신가요?







  반복되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아란은 휴대폰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또 어디서 술 진탕 마시고 뻗은 거야? 내가 못 살아!’

  전화를 받아야 어디든 데리러 갈 텐데 전화를 받지 않으니 화난 마음이 점점 걱정으로 채워졌다. 아란은 다시 아이들이 누워있는 침대로 갔다. 둘째 영훈이 발로 걷어 찬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첫째 시훈은 달콤한 꿈을 꾸는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천사처럼 잠든 아이 둘을 보고 있으니 잠시나마 분노와 불안이 가라앉았다.

  지금의 아란을 보면 누구도 그녀가 ‘Y여대 경영학부 수석 입학, 수석 졸업 출신, 포털 사이트 N사에서 일하던 커리어우먼’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란은 졸업 직전에 소개팅으로 기택을 만났다. 기택은 처음 아란을 만난 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꿈에 그리던 Y여대 여신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남자들이 그러하듯 기택에게도 Y여대생은 지적이고, 아름답고, 여성스러울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Y여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막연한 바람도 있었다. Y여대 출신 여성을 아내로 맞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성스러움’에는 구시대적 아내상-내조를 잘하고 아이를 잘 키우고 요리와 집 정리를 잘하는 것과 같은-이 포함되어 있었고, 기택도 그런 생각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란은 학부 전체 대표를 맡을 만큼 리더십이 있었다. 외향적인 성격으로 N사에서 일할 때에도 타 회사 사람과 미팅을 하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일 등에 거침없었다. 똑똑하고 활달하고 사람들과 교류를 잘하는, 누구라도 사회생활에서 성공가도를 달릴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이었다. 아란이 N사 오 년 차였을 때, 머지않은 미래에 아란이 최연소 여자 임원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점치는 상사도 있었다.

  아란은 기택과 함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모습이 사뭇 달랐다. 누구보다 혼자서도 뭐든 척척 잘 해낼 것 같은 그녀는 기택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아기 사슴이 되었다. 아란이 볼 때 기택은 공부도, 운동도, 돈 관리도, 대인관계도, 심지어 청소까지도 자신보다 더 잘했다. 똑똑한 그녀가 A부터 Z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었던 것이다. 딱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기택이 결혼 전까지 잘 숨겼기에 아란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첫째 임신과 동시에 아란은 사표를 냈다. 그날 사내 메신저의 절반이 아란의 사표 소식을 전달하고 다시 전달하는 것이었을 만큼 핫이슈였다. 누구보다 오래 회사에 뼈를 묻을 것이라 생각한 그녀가 미련 없이 떠났다. 대중의 짐작과 달리 아란은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나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았고, 이제 머리를 쓰지 않는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아란은 기택 앞에서 무엇이든 ‘난 잘 모르겠다’와 ‘난 잘 못하겠다’ 전법을 썼다. 기택은 아란이 정말로 잘 모르고, 잘 못하는 줄 알고 집 안팎의 일을 자신이 도맡았다. 반찬과 국거리는 배달 업체와 양가 부모님께 의지했고, 청소는 도우미 이모님의 손을 빌렸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후 아란은 마사지를 받거나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아이 유치원 친구의 엄마들을 만나 티타임을 가졌다. 하루 종일 환자 진료를 하고 진이 빠져 집에 돌아온 기택이 아이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고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보며 아란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이들 교육 하나만이라도 내가 확실히 맡아서 하자.’


  기택이 퇴근해 집에 돌아오는 여섯 시 삼십 분 전까지 아이들이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스케줄을 짰다. 연령에 따른 학습 능력 차이 때문에 아이 둘을 픽업해 각기 다른 학원으로 날라야 했다.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아이를 이동시켜주는 학원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학원도 있었다. 시간대별로 다른 학원으로 이동했고, 요일별로도 달랐다. 월, 수, 금 오후 세 시에서 네 시에 피아노 학원에 간다면, 화, 목 네 시는 미술학원인 식이었다. 또 월, 수, 금 네 시 반 스케줄과 화, 목 네 시 반 스케줄이 달랐다. 시훈과 영훈의 스케줄도 달랐기 때문에 아란의 매일 오후는 P(파킹)와 D(드라이빙)의 반복이었다. 기택이 퇴근하면 다 같이 모여 앉아 배달 음식을 그릇에 예쁘게 옮겨 담아 맛있게 저녁을 먹었고, 아란이 그릇을 애벌 설거지해 식기 세척기에 넣는 동안 기택은 아이들을 씻긴 다음 방으로 데리고 들어 가 침대에서 레슬링인지 태권도인지 격투기인지 숨바꼭질인지 그 모든 것인지 알 수 없는 놀이를 했다. 아란이 식사 뒷정리를 마치고 씻고 방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기택은 자유 시간을 가졌다. 아란은 침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함께 잠이 들었다.




 


  시훈이 일곱 살이 되자 기택은 시훈이 앞으로 다니게 될 초등학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 애들 고등학교까지 쭉 연결되는 사립학교에 보내면 좋겠는데..!”

  “우리 시에 사립초가 없는데...?”

  “대전 중구에서 병원까지 출퇴근 괜찮아. 이사 가자.”

  반년만 더 있으면 유치원도 졸업인데 당장 유치원을 옮기면 여러모로 난감했다. 겨우 (자신이) 적응하고 (아이들을) 적응시킨 학원 스케줄을 다시 짜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아란은 대전에서 세종까지 라이딩을 감행했다. 시훈이의 아침 등원은 아빠가 출근길에 맡고 영훈이만 이사 간 동네의 유치원과 학원으로 옮겼다. 영훈이는 차가 유치원으로 와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날라다 주는 학원에 등록했다. 시훈이보다 어린 영훈이가 혼자 학원차로 옮겨 다니는 모양새를 만들어 두고 시훈이를 직접 픽업해 여기저기로 날라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취학 기와 아직 거리가 먼 영훈이 잠시나마 ‘아무 학원’에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아란과 기택은 결혼 10주년 기념일을 맞아 서울에 있는 아란의 동생 곽태경의 레스토랑에 갔다. 적어도 육 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인기 레스토랑이었다.

  “야 너 요즘 통장 잔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는데? 엄마한테 들었는데, 차도 바꿨다며?”

  태경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처남이랑 처남댁 둘 다 일해서 육아며 집안일은 어떻게 하고 있어?”

  기택이 태경에게 물었다.

  “나경이가 많이 하고 있죠. 시간 될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집에 좀 더 오래 머무는 사람에게 일이 쏠리는 것 같아요. 나경이 조만간 일 그만둘 것 같아요.”

  “왜?”

  아란과 기택이 동시에 물었다.

  “내 벌이도 괜찮고. 나경이도 일 하기 싫다고 하고. 그래서 나경이가 일 그만두고 육아와 집안일을 전담하기로 했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 도우미 이모님께 도움 좀 받으면 혼자 할 수 있겠대. 나도 미슐랭 스타 받으려면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그렇게 결정했어.”

  아란은 누가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듯 불편함을 느꼈다. 아이들을 교육 기관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외의 일은 기택이 챙겨보고 있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이모님과 연락을 취하거나 급여를 주는 일부터 집의 각종 공과금과 세금을 납부하는 것, 돈을 모으거나 투자하는 일, 아이들을 씻기고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것까지 기택이 처리했다. 주말에는 시댁에 가거나 나들이를 나갔다. 나들이를 나가면 기택이 아이 둘을 케어하고 아란은 그늘에서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넉넉한 가정 수입, 공과금이나 세금 납부나 투자 등 숫자와 관련된 머리 아픈 일을 도맡아 하며 아이들도 자상하게 챙기는 남편, 사회생활에 제반되는 각종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여유로운 일상까지. 아란은 모든 게 다 좋았다. 기택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날만 아니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기택은 한 달에 한두 번 만취 상태로 귀가했다. 필름이 끊길 만큼 술에 취해서도 용케 집을 찾아 들어왔다. 몇 번은 기택이 아란을 대리운전기사로 착각하고는 대리 기사를 보내 달라고 전화한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기택을 데리러 가거나 아란이 대리운전 회사에 전화해 기택이 있는 곳으로 대리운전기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고약한 술버릇을 오 년 넘는 연애 기간 동안 아란은 왜 몰랐던 것인지, 영리한 기택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나쁜 버릇-이를테면 도박 같은 것-이 또 있는 건 아닌지 스멀스멀 걱정이 기어 올라왔다.

  “띠띠띠띠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에 선 잠이 깬 아란이 거실로 나왔다. 기택이 초점 없는 눈으로 집에 들어왔다.

  “큰일 날 뻔했어.”

  “무슨 일이야? 전화도 안 받고? 어후 술 냄새.”

  기택은 좀비처럼 욕실로 들어가 양치와 세수를 하고 나오더니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졌다. 아란은 기택의 휴대전화 통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대리 운전기사를 부른 흔적이 없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온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기택은 아홉 시가 넘어 일어났다. 병원 휴가 기간이었기 때문에 아란은 기택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겨우 일어난 기택은 물을 마신 후 몇 차례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차는 어디에 두고 온 거야?”

  “차?”

  기택은 또 필름이 끊겼는지 한참 어젯밤 일을 떠올리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번뜩 기억이 나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양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

  “나 × 됐어. 혈중 알코올 농도 어쩌고 저쩌고. 면허 취소입니다.라고 말했어.”

  “응? 뭐? 꿈꾼 거 아냐?”

  기택의 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아란이 전화를 받아 스피커를 켰다.

  “변기택 씨. 미라클 보험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정비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범퍼 복구하면 이 천만 원 정도 받고 팔 수 있을 것 같다네요. 외제차라 범퍼 복구 비용이 꽤 많이 들 것 같은데, 어떻게 할지 생각해서 정비소로 직접 연락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기택은 전화를 끊은 후 제 머리를 식탁에 두 번 박더니 그대로 식탁에 머리를 묻었다. 아란은 면허취소가 기택의 꿈에 나온 말이 아님을 알았다.








  아란은 기택이 면허를 다시 획득할 수 있는 날까지 기택의 출퇴근길 라이딩을 맡게 되었다. 집 청소 도우미 이모님께 급여를 올려 드리고 영훈의 등 하원을 부탁했다. 대전에서 세종까지 달려 시훈을 등원시키고 영훈을 병원에 내려준 후 집으로 돌아오면 시곗바늘은 어느덧 열 시에 가까워져 있다. 오후 두 시 반이면 집을 나서 시훈의 유치원으로 간다. 시훈이의 학원과 학원 사이 동안 아란은 하릴없이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신다. 시훈이가 마지막 학원 스케줄을 마치고 나오면 기택이 근무하는 병원 주차장으로 가서 기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란의 하루는 D로 시작해 P로 끝나고 있었다.

  “피곤하다 피곤해. 어서 집에 가자.”

  기택이 차에 몸을 실었다. 아란은 기어 스틱을 P에서 D로 옮겼다. 지친 두 남자가 자동차 엔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짧은 단잠에 빠졌다. 아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모든 걸 남편한테 다 맡기고 편안하게 살아보겠다던 제 꾀에 제가 빠진 기분이었다.

  ‘직장 생활도, 결혼도 삼 년 차와 십 년 차를 잘 버텨야 한다고 했어. 십 년 차라 고비가 온 것일 거야. 이 또한 지나간다. 모든 순간은 다 지나간다.’

  룸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시훈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모님과 함께 있는 영훈이 눈에 밟혔다. 우리가 어서 가야 이모님도 퇴근하신다. 아란은 액셀을 밟아 속력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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