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암이라고 했다. 영경은 눈앞이 아찔했다. 이제 겨우 딸 지우의 첫 생일이 지났다. 암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인혁이 앞으로 겪을 고통보다 자신과 지우의 막막한 앞날이 먼저 걱정되었다.
천만 다행히 다른 곳에서 전이된 게 아니라 척추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암이었다. 치료 예후가 좋다는 말에 인혁과 영경은 웃음을 되찾았다. 영경은 어린 지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인혁 병간호에 매달렸다. 암 치료 관련 책을 사서 학교에 다닐 때처럼 공부했다. 암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구해서 챙겨 먹였다. 인혁은 국소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 복용을 병행하며 회사에 나갔다. 선체 조립 일을 하는 인혁은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허벅지로 통증이 내려오고 볼일을 보는 게 불편해졌을 때도 평소와는 다른 형태의 통증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산재 신청할 수 있는 거 아냐?”
영경이 말했다. 인혁의 회사에서 희귀 암에 걸린 젊은 직원이 직업병 산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한 일이 있었다. 인혁도 그 점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회사 측에서도 혹시나 인혁이 골치 아픈 일을 만들까 봐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회사는 인혁이 편안하게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병가나 연가를 넉넉히 인정해주었다.
인혁은 일 년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 또 일 년간 재발 방지를 위해 주기적으로 병원을 오갔다.
“이제 몸 쓰는 일 그만하고 싶어. 겨우 치료했는데 또 아프면 안 되잖아?”
“그래. 무슨 말인지 이해해. 그런데 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거야?”
“여기 앞에 치킨집 사장님 말이야. 김 사원 매형인데, 가족 모두 외국으로 가게 돼서 치킨집 내놓는다고 해.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정리하게 돼서 권리금 싸게 내놓을 거라는데, 저기 치킨 맛있어서 우리도 자주 시켜 먹었잖아. 퇴사하고 치킨집 인수받아서 해보고 싶어.”
영경은 인혁이 다시 태어난 것 같아 모든 일에 감사했다. 인혁의 생각이 그렇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은 수입이지만 출판사 동화 그림 작가로 꾸준히 자신이 벌고 있는 돈도 있으니 치킨 가게가 잘 안 되더라도 먹고살 수는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곧 둘째가 태어날 테니 인혁이 개인 사업을 하면 전보다 육아를 도울 시간도 늘어날 것 같았다.
회사원들이 퇴직 후 가장 많이 하는 창업이 치킨가게라고 해서 인혁도, 영경도 만만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치킨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 주인의 월 순수입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이었다. 둘째 연우가 태어나며 영경은 육아 휴직을 했다. 조금 더 지나면 자리를 잡고 괜찮아질 거라 기대한 인혁의 수입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집 담보 대출 이자라도 줄여야 했다. 영경은 은행에 근무하는 사촌오빠 오민철의 도움으로 초저리 장기 대출 상품으로 갈아탔다.
‘나도 은행 다니는 남자랑 결혼할 걸.. 오빠 외벌이로 아이 셋 거뜬히 잘 키우고 있잖아. 새언니는 대출 상환금 때문에 걱정해본 적이 있을까?’
민철의 소개로 만났던 K은행 직원이 떠올랐다. 영경만 오케이 했다면 결혼까지 갔을 것이다. 외모로 남자를 판단한 철없는 지난날의 자신을 탓해 보지만 이제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치킨집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답답했던 것일까. 인혁은 암 투병을 하며 끊었던 담배와 술을 다시 시작했다.
“어떻게 찾은 건강인데, 내가 왜 오빠 퇴사 결정에 순순히 따른 줄 알아? 무엇보다 오빠 몸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우리 생각 안 해? 오빠 몸에 암이 있다는 말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생각 안 해봤어?”
“그래. 나도 고맙게 생각해. 전부 네 덕분이야. 나도 알아. 장사가 안 되니까 답답해서 그랬나 봐. 잘 컨트롤할게. 믿어줘.”
인혁은 영경의 믿음을 금세 깨뜨렸다. 술에 취한 날이면 인혁은 어김없이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아버님, 좀 도와주세요. 지우 아빠가 술 담배를 해요. 병원 안 가게 된 지 얼마 됐다고. 제가 말려도 소용없어요. 어머님 아버님이 얘기 좀 잘해주세요."
영경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전화기에 대고 엉엉 울었다. 시부모님이 그날 곧장 군포로 올라오셨다.
영경의 시부모님은 한 마디로 ‘어메리칸 스타일’이다. 옛날 어른들 답지 않게 철저한 양성평등 사고를 가지고 있다. 시댁에 가면 아들 내외를 손님으로 대한다. 손님한테 집안일 시키는 주인이 없듯, 영경이 시댁에 가면 시부모님께 대접을 받는다. 시부모님 두 분이 나란히 앞치마를 매고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인혁과 자신도 저렇게 나이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경의 시니어 롤모델이 시부모님이었다. 나이 들어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며 일찍부터 노후 대비를 했다고 한다. 결혼 전 예비 시부모님을 만나러 갔을 때 영경과 인혁을 앞에 두고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 삶이 있고, 자식도 자식의 삶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더 늙고 힘이 약해져도 너희한테 의지하거나 부양받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준비해뒀고. 대신 결혼할 때 따로 도움은 주기 어려울 것 같아. 이점은 일찍부터 인혁이한테 얘기해왔기 때문에 들은 적 있을 것 같구나.”
영경의 울음 때문에 당황했는지 평소답지 않게 빠른 걸음을 하셨지만, 시부모님은 이내 평정심을 찾고 한 걸음 물러나 영경의 부부와 대면했다. 부모로서 마땅한 조언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너희들 인생은 너희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부모 손을 떠났으니 건강도 자기 몫이라는 식이었다. 영경은 시부모님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우 돌이 되기도 전에 영경이 복직했다. 회사에서 복직 압박을 주기도 했고, 가계 수입이 빠듯해 돈이 궁했다. 평소 급여보다 적은 금액을 받고 당분간은 완전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연우를 돌보며 일을 할 수 있어 영경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감일에 쫓겨 밤샘 작업을 한 다음날이었다. 작업 결과물을 회사에 넘기고 영경은 침대에 뻗었다. 지우 등원과 연우 돌보는 일을 인혁에게 맡겼다. 영경이 자는 동안 인혁은 연우를 돌보며 집 청소를 하고 점심까지 차려둘 것이다. 영경이 푹 잘 수 있도록 연우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나갈 수도 있다. 인혁은 주로 평일 저녁 시간과 주말에 치킨 가게를 지키는 편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영경을 도와 육아와 집안일에 진심을 다했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언니 나경의 전화였다. 근황을 주고받던 자매의 수다는 보통 여자들이 그러하듯 ‘아무 잡담’으로 이어졌다.
“재밌는 얘기 해줄까?”
“뭔데?”
“우리 아주버님. 음주 운전해서 면허 취소됐어.”
“이거 재밌는 얘기 맞아? 의사 면허에는 문제없는 거지?
“응. 사람 쳤으면 의사 면허 날아가는 건가? 가로수 들이박았대. 그래서 차는 완전 날아갔고. 그런데 우리 형님이 요즘 아주버님 발이 되어 주고 있다는 거야.”
“발? 출퇴근 운전?”
“그래 맞아. 똑똑한 형님이 제 꾀에 넘어갔어. 더 똑똑한 사람 만나서 바보인 척하고 살더니, 요즘 매일 남편이랑 애 둘이 직장과 학원으로 모셔다 드리느라 마사지하러 갈 시간도 없다고 어머님이 속상해하시는데, 난 왜 이리 고소하지?”
“크크. 좀 고소하긴 해. 그 형님은 이상하게 좀 밉상이야. 그나저나 언니는 돈 걱정 없어서 좋겠다. 요즘 형부가 압구정 돈 다 쓸어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무슨 소리야?”
“친구가 결혼기념일이라서 큰맘 먹고 형부 레스토랑에 예약하려고 알아보니 6개월치 예약이 다 찼다고 하던데?”
“아... 안 그래도 태경이가 너희 부부 한 번 초대한대. 그런데 노 키즈 레스토랑이라 애들 맡겨야 돼. 우리 집에 맡기고 한 번 데이트해.”
“부러워 부러워.”
“에휴.. 겉으로 보기엔 번지르르해 보여도 나도 속앓이 하는 거 많아. 우리 시어머니 어떤지 잊었어?”
“언니가 뭐 시어머니랑 같이 살아?”
“받은 게 다 족쇄야. 시어머니가 우리 집 대출금 갚아주는 대신 우리 매주 시댁 행이야. 자기네 집 가까이 집 사준 이유가 다 있다니까. 갑자기 집에 들이닥칠 때 보면 집 깨끗하게 해 놓고 사는지 검사하러 오는 것 같다니까. 냉장고도 다 열어 봐. 애들 교육까지 간섭하려고 해서 내가 정말 미치겠어. 그뿐인 줄 알아? ................ (이하 생략).”
인혁은 지우를 하원 시키고 아이 둘 목욕까지 다 해둔 다음 출근 준비를 했다.
“저녁 뭐 먹을래? 가서 치킨 한 마리 튀겨서 바로 배달 보내줄까? 생맥이랑?”
“좋지.”
영경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치맥이다. 방금 막 튀긴 후라이드 치킨이 도착했다. 이제 막 이유식을 먹은 연우는 놀이 매트 위에 누워 몸을 이리 굴렸다 저리 굴리며 식사 후 나른함을 즐기는 것 같다. 지우는 엄마 옆에 앉아 다리 하나를 집어 들고 살점 하나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깔끔하게 먹어치운다. 후라이드 치킨의 생명은 바삭함이다. 맥주는 김이 살아 있어야 맛있다. 시간이 지나면 눅눅하고 밍밍해진다. 가장 맛있을 때 즐겁게 흡입하는 게 치킨과 맥주에 대한 예의다.
결혼은 치맥이다. 처음엔 바삭하고 톡 쏘고 시원하다. 식으면 눅눅하고, 밍밍하고 미지근하다. 다행히 에어 프라이기가 있다. 에어 프라이기에 넣으면 눅눅해진 치킨이 다시 바삭하게 살아난다. 영경은 자신의 결혼 생활도 에어 프라이기에 들어갔다 나온 후라이드 치킨처럼 다시 바삭하고 맛있어지길 바랐다.
‘그럼 맥주는 어떻게 회생시키지?’
맥주는 답이 없다. 뚜껑을 열었으면 한 번에 다 마셔야 한다. 영경은 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반드시 바삭하고 톡 쏘고 시원할 때 치킨과 맥주 모두 다 먹으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