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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의봄 Aug 25. 2022

결혼 생활의 기쁨과 슬픔(14화-황은희)

당신의 결혼 생활은 안녕하신가요?



  "은희야, 나 스웨덴 본사로 파견 제안이 들어왔어. 네가 같이 간다고 하면 파견 가고 싶어."

  "얼마 동안?"

  "최소 4년이야. 리프레쉬 휴직 생겼다고 했잖아? 그걸로 우선 1년 휴직하고, 학위 취득 휴직을 추가로 하든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생각해 볼래? 네 의사가 중요해."

  "그래. 갑작스러운 얘기라 당황스럽네. 며칠 생각 좀 해볼게."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남편에게 생각지 못한 소식을 들은 은희는 출근 내내 멍했다. 편안한 일상에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벗어나면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스웨덴도 사람 사는 곳인데,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거기라고 뭐 별다를 게 있을까? 양쪽 뇌에서 두 명의 은희 분신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가자. 가지 말자. 가자. 가지 말자.


  "황차장 지하철 내렸어요? 오늘도 카페라테?"

  "네. 그쪽으로 갈게요."

  은희는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단골 카페로 갔다.  

  "오늘따라 더 화사하네요."

  은희는 쑥스러운 듯 한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꽂으며 오 부장이 건네는 커피를 받았다.  

  "무슨 일 있어요? 옷은 화사한데 가만 보니 얼굴이 어둡네요. 말수도 적고?"

  아닌 게 아니라 은희는 속이 복잡해서 오 부장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희와 오 부장이 출근 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해서 모닝커피를 마신 지도 일 년이 넘었다.  

  "부장님, 요즘 저희 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거 아시죠?"

  "뭐... 알긴 알죠. 그런데 우리 넘지 말아야 할 선 넘은 거 없잖아요? 당당하게 행동해요."

  불미스러운 소문 앞에서 여전히 여자가 더 불리한 게 현실이다. 애가 없어서 자유로워 그렇다는 둥, 애 셋 낳은 오 부장 사모님과 미스 같은 황차장 몸매가 같겠냐는 둥, 다른 기혼 여직원들과 달리 황차장이 외모를 더 잘 꾸미는 건 직장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둥. 입에서 입을 거쳐 은희 귀에 별별 이야기가 다 들어왔다.  


 


 


  K은행 20년 차로, 차장인 황은희는 쇄골 아래까지 내려오는 찰랑찰랑한 생머리에 군살 하나 없이 탄력적이고 날씬한 몸매를 가졌다. 마흔다섯인 은희를 처음 본 사람들은 실제보다 열 살쯤 어리게 본다. 은희와 민철이 가까워진 것은 일 년 전쯤 회사 근처 헬스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였다.  

  "황차장 여기 헬스장 다녔어요? 퇴근 후 매일 오는데 왜 처음 봤죠?"

  "여기 다닌 지 얼마 안 됐어요. 집 근처 헬스장보다 여기가 좋아 보여서 옮겼어요."

  은희는 이전 헬스장에서 일 년 넘게 일대일 운동 코칭을 받았기 때문에 기구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요일별로 근력 운동 루틴이 확실했다. 제대로 배운 운동과 식단 관리 덕분에 마흔다섯이지만 이십 대 못지않은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도 식단관리하는데, 우리 같이 점심 먹을래요? 식단 관리 안 하는 사람들이랑 점심 같이 먹기 힘들지 않아요?"

  오 부장, 그러니까 오민철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샐러드나 담백한 메뉴 위주의 식당에 가거나 도시락을 싸와서 함께 먹는 날도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식단 관리용 도시락을 휴게실에서 먹는다는 소문이 났다. 뜻을 함께하려는 직원 두세 명이 점심 식사에 동참한 적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은희와 민철은 모닝커피로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점심 식사와 에프터눈 티를 함께 마셨다. 퇴근 후에는 함께 같은 헬스장을 향했고, 운동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공통점을 알아갔다.  

  "부장님도 출근길에 오디오북 들으세요?"

  "오늘 아침에 김영하 <여행의 이유> 들으며 왔는데, 재밌어서 종이책 주문했어요. 정말 재밌는 책은 종이책으로 읽어야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래요. 책 읽는 사람 드문데, 부장님과 운동 말고도 나눌 대화 소재가 또 생겼네요. 전 자기 전에 한두 시간씩은 꼭 책을 읽는 편이에요. 종종 같은 책 읽고 얘기 나눌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책을 핑계로 퇴근 후 만나는 횟수가 늘었다. 은희는 토요일 오전에도 남편에게 운동을 하고 독서 모임 후 들어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토요일에는 민철이 회사 근처도, 은희 집 근처도 아닌 곳에서 차를 대고 기다렸다. 두 사람은 도심에서 먼 곳으로 나가 커피를 마시며 여유 있는 토요일 오전을 즐겼다. 민철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올 때면 은희는 영혼이 가득 찬 기분이었다.  







  옆사람의 온기가 필요한 초겨울 토요일 오전이었다. 은희와 민철은 인적이 드문 숲길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듯 닿았다. 민철은 슬며시 은희 손을 잡았다. 은희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 두 사람은 각자의 남편과 아내에게 전화해 집에 늦겠다는 말을 전했다. 민철은 회사 일을 핑계로 집에서 나와 아내에게는 '장례식장에 갔다가 늦는다'라고 거짓말을 했고, 은희는 친구 A가 부부싸움 후 속상해서 연락이 왔다며, 친구의 기분을 전환 시켜주고 들어가겠다고 둘러댔다. 은희와 민철은 토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갔다. 두 사람은 가운데 놓인 팔걸이를 위로 올리고 계속 손을 잡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둠이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은 수제 맥주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술에 꽤 취한 둘은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은 낯선 거리를 거닐며 연애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대리 운전기사를 부르기 전 차 안에서 꽤 진한 키스를 나눴다.  

  딱 여기까지였다. 더 나아가면 안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일상에 활력을 주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가진 사이, 연애할 때처럼 도파민이 분비되어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이. 서로가 원하는 게 여기 까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쯤에서 은희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은희 가족은 남편 철민과 비숑프리제 두 마리다. 결혼 초 아이를 가져보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은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아이를 포기했다 생각했지만, 주위 어른들은 더 노력하지 않았다며 타박했다. 동년배 다른 남자들에 비해 자식에 대한 집착이 적었던 철민은 은희에게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댕댕이들과 알콩달콩 살자고 말했다.  

  은희와 철민은 수입을 합치지 않았다. 세계적 자동차 회사 연구원인 철민은 집 담보 대출 원금과 이자를 내고, 집을 청소해주시는 이모님 월급과 각종 공과금과 세금, 공동 생활비를 담당했다. 은희의 월급은 오롯이 자신의 미모와 건강을 유지하고 부모님 용돈을 드리는 데 썼다. 부양해야 하는 자식이 없다 보니 여유 있게 쓰고도 매월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월세가 나오는 집도 한 채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철민 소유의 집도 따로 한 채 있었다.  

  은희에게 철민은, 철민에게 은희는, 경제적인 면만 두고 볼 때는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였다. 각자 힘으로 충분히 여유 있게 먹고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게다가 은희는 직장에 소울 메이트도 있다. 은희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씩 체크하며 철민을 따라 스웨덴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은희에게 철민은-두 번쯤 민철이라 부르고는 속으로 허걱 하고 놀란 적이 있다-편안함이고 보호막이다. 철민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돈 걱정, 돌봐야 하는 자식 걱정 없이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고개를 내젓게 된다. 자신이 소울메이트로 여기고 있는 민철의 집만 해도 어떤가. 돌봐야 하는 아이가 셋이다. 민철은 '자식은 꼭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민철같은 남자와 결혼했다면 지금처럼 민철같은 소울메이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멍멍이 같은 소리냐고 묻는다면, 솔직한 마음이 그렇다며 자신을 변호할 수밖에.  

  코로나가 생기기 전까지 은희는 휴가 때마다 철민과 해외 곳곳을 여행 다녔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면 수많은 여행 사진으로 가득 채워진다. 함께 간 나라의 온도와 하늘, 햇살의 느낌과 음식의 향기를 공유하고 있다. 영혼을 채워주는 남편은 아니지만 은희 삶의 한 축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기둥 같은 사람이 철민이다.  

  '그 사람은 어떨까? 직장에 오피스 와이프가 있을까? 그 사람은 무슨 재미로 나와 살까? 나와 같은 이유일까?'

  민철이 자신을 대하듯 철민이 직장의 여자 동료를 대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적반하장. 내로남불. 내가 하면 선을 잘 지킨 것인데, 남이 하면 불륜이다. 은희는 이기적인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심심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지켜오기 위해 에너지원을 만든 것뿐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생각만으로 붉어오는 얼굴을 누가 볼까 봐 양손으로 감싸 숨겼다.







  '철민과 함께 스웨덴으로 가면 어떨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이 주는 즐거움이 있을 테지.'

  은희는 여행하듯 일상을 살게 될 스웨덴에서의 자신과 매일 영혼을 채워주는 민철이 가까이 있는 현재의 삶을 저울질했다. 철민 입장에서 생각하면 답이 이미 나와 있었다.

  '그 사람만 스웨덴으로 보낼까? 아니면, 모든 것을 지금 이대로 유지할까? 그럼 회사에 도는 소문은 어떻게 수습하지? 민철과 나는 헬스장에서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은희는 검색 포털을 열어 강아지를 데리고 비행기에 탑승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철민이 파견될 거라는 스웨덴 예테보리 거리 사진을 보며 그곳을 산책하는 자신과 철민과 댕댕이들을 상상했다. 철민과 공유할 온도와 하늘과 햇살의 느낌과 음식의 향기가 또 하나 적립될 것이다. 2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쉬어갈 타이밍도 되었다. 은희는 철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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