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이제와? 아니 그러니까 드디어? 눈을 뜨자마자 선아는 어제 사다 둔 임신테스트기를 뜯고 화장실로 향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반쯤 뜬 상태로 테스트기에 소변을 적셨다. 마지막으로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한 것은 아마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한 줄만 뜨는 임테기를 보는 데 지쳐서 소변을 적신 후에 곧바로 확인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다. 5년이 지났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화장지로 분비물을 닦고 임테기를 저쪽에 치워두려고 했는데 눈곱 때문에 떨어지지 않던 눈이 번쩍 뜨인 것과 동시에 평소의 두 배로 커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두줄! 꿈인가? 그러니까 최근에 느낀 피곤함은 이것 때문이었던 것인가?
선아는 상민을 흔들어 깨웠다. 상민은 아침부터 웬 호들갑이냐며 짜증을 냈다. 선아는 상민의 눈앞에 임테기를 들이밀었다. 상민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고도 잠이 덜 깼는지 한참 임테기를 응시했다.
"임신한 거야?"
상민은 여전히 잠에서 덜 깬 표정이었다.
"아마도. 아기 심장 뛰는 소리까지 확인해야 임신 확정이겠지만 일단은 맞는 것 같아. 생리 예정일보다 이 주 정도 지났으니 바로 산부인과 가 봐도 될 것 같아. 오늘 조퇴할 수 있어? 병원 같이 가보자. 임신이 맞다면.. 우리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 태하 어린이집 픽업 가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 좀 나눠야 할 것 같아."
"얘기할 게 뭐 있어? 우리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야? 태하도, 뱃속 아기도 다 잘 키우는 거지. 나 가슴이 울렁거려. 딸이면 좋겠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아빠가 되는 게 내 꿈이었어. 오늘 오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선아는 서른둘에 상민과 결혼했다. 결혼 전부터 아기를 빨리 낳아 키우자는 데 생각이 일치한 두 사람은 임신 과정을 미루지 않았다. 선아가 서른네 살이 될 때까지 자연 임신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두 사람은 난임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선아는 인공 수정을 시도하게 되었다.
인공 수정 한 사이클을 시도하려면 한 달 안에 적어도 세 번은 병원에 가야 했다. 생리 2~3일 차에 병원에 가서 과배란을 유도하기 위해 먹는 약과 배 주사를 받았다. 인터넷으로 배에 주사 놓는 법을 검색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했지만 주삿바늘 뚜껑을 열고 바늘을 제 배 위로 가져오자니 식은땀이 났다.
‘앉은 자세로 배꼽 근처에 살을 좀 꼬집고, 드러난 살에 바늘을 빠르게 꽂고 약은 천천히.’
살을 꼬집는 데까지는 진도가 나갔는데 바늘을 꽂을 수가 없었다. 예방접종을 할 때에도 시선은 항상 다른 곳을 향했던 선아였다. 자기 스스로 자기 배에 주사 바늘을 겨누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한 시간을 혼자 끙끙대다가 포기했다. 상민에게 주사기를 넘겼다. 상민도 심약하긴 마찬가지였다. 눈을 질끔 감고 바늘을 쿡 찔러 넣었는데 선아가 악 소리를 냈다. 주사를 맞은 자리에 멍이 들었다.
상민에게 배를 맡기느니 직접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바늘을 찌르고 천천히 약을 주입하는 내내 손이 떨렸다. 주사 놓기에 성공하고 나면 긴장이 풀리면서 몸살이 난 듯 온몸이 쑤셨다. 이틀 간격으로 배 주사를 네 번 맞았다. 정상 배란을 할 때도 가끔 배란통이 심해 선아는 타이레놀을 먹곤 했다. 인위적으로 과배란을 시키니 생리통만큼 아팠다. 생리통은 한 달에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데 과배란 주사를 네 번 맞는 내내 주사를 놓을 때의 통증과 아랫배와 허리, 골반을 감싼 묵직한 통증으로 고통스러웠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난포가 터지는 주사를 맞았다. 살 떨리는 셀프 주사를 이겨내고도 난포가 터지지 않으면 헛수고니까.
대망의 인공수정 첫날! 한 사람이 눕기에는 꽤 넓은 침대로 간호사가 선아를 안내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같은 복장을 한 여자 두 사람이 와서 선아 옆에 누웠다.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같은 자세를 하고 아래쪽에 같은 조치를 하고 나니 의사 선생님이 와서 미리 채취한 건강한 정자를 주입했다. 의사는 마치 난임 AI 같았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수백 번 반복한 듯한 의사의 손놀림에 선아는 배아복제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인공 수정 후 질정을 넣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착상이 잘 되도록 하는 약제인데 질정을 넣고 곧바로 움직이면 약이 아래로 흘러 내려오기 때문에 투약 후 십분 이상 누워 있어야 했다. 회사에서 누을 곳이 없어서 청소하는 여사 님들의 휴게 공간을 침범했다. 사정을 말씀드리니 여사 님들이 흔쾌히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여기까지가 인공 수정 첫 번째 달에 겪은 과정이었다. 첫 달에 실패한다면 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을까? 선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직장을 다니며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섯 번째 인공수정까지 국가에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다섯 차례의 인공 수정을 시도하는 동안 지원금을 제하고도 이백만 원 정도의 돈이 들었다. 여섯 번째부터는 국가 지원비가 없었다. 선아는 다섯 번의 인공 수정 동안 몸과 마음이 지쳤고, 인공 수정 시술 비용도 부담스러워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선아와 상민이 아이 입양에 대한 생각을 나눈 건 결혼 초부터였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좋아했다. 하늘이 주신다면 셋까지 낳아 키우자고 생각을 맞추었다. 아이 둘을 낳고 한 명을 입양하는 것도 좋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인공 수정 횟수가 늘어날수록 선아는 입양 생각이 점점 커졌다.
"그래. 우리 입양해서 아이 키울 생각 있었잖아. 회사에 와이프가 시험관 시술한 분이 계신데, 너무 힘들다고 손사래를 치셨어. 안 해보고 쉽게 얘기하면 안 된다고. 옆에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죄를 짓는 것 같더래. 이만하면 우리 노력할 만큼 했어. 예쁜 아기 입양해서 마음을 다해 키워보자."
선아와 상민은 마음이 맞았지만 어른들에게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결정권은 없지만 통보는 해야 했다.
"너희 아직 나이도 젊은데 더 기다려보지 그러니? 인공 수정이 안 되면 시험관 그것도 해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텐데, 그렇게 서둘러서 입양을 해야겠니?"
예상대로 양가 부모님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선아의 부모님은 선아가 힘드니 어쩌겠냐, 남의 자식 키우는 일이 보통이 아닌데 마음은 굳게 먹었냐고 물었다. 상민의 부모님은 시험관 시술까지 시도하지 않은 며느리를 원망하는 말투였다. 무슨 일이든 당사자가 되어 보지 않고는 쉽게 말해선 안 된다. 인공 수정이고 시험관이고 자신은 해 보지도 않은 일을 기대만큼 시도하지 않고 포기한다고 해서 노력이 부족하다느니, 의지가 약하다느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자기 딸이었다면, 딸이 너무 힘들다고 하는데도 시험관 시술을 시도해보라고 말할 것인가? 선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시부모님을 보며 딸 같은 며느리가 되겠다던 다짐을 구겨버렸다.
태하는 첫니가 나기 전에 선아와 상민에게 왔다.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는다는 옛 말이 맞았다. 태하는 크게 소리 내어 우는 법이 없었다. 열두 시간 통잠을 잤고, 자는 동안 기저귀에 쉬를 하지 않았다. 선아가 아침에 일어나면 기저귀가 가벼웠다. 밤에 엄마가 자신의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잠에서 깨는 수고로움을 주지 않으려는 듯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못한 쉬를 몰아서 했다. 눈을 뜨면 방긋방긋 웃으며 애교를 발산했다. 태하의 웃는 얼굴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두 사람의 기쁨이었다. 분유도 이유식도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고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우리 태하 너무 예쁘지? 그런데 난 가끔 태하 보면 눈물이 나. 소리 내서 크게 울고 떼를 써도 나는 태하 사랑할 건데, 친엄마랑 떨어진 경험 때문인지 버림받지 않으려고 예쁜 짓만 하는 것 같아 속상해."
"그런 말 하지 마. 그건 타고난 태하의 기질 때문이야. 태하 엄마, 아빠가 누구야? 너랑 나야. 태하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가끔 선아의 언니 선미가 조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아직 어려 멋모르는 조카는 태하가 선아 이모의 친자식인지 아닌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기가 보고 싶다며 찾아오는 조카와 언니가 고맙고 반가웠다. 태하에게 동생을 만들어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사촌 언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선아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앞니 두 개가 나란히 쏘옥 나온 복숭아 같은 얼굴, 걸음마를 뗀 순간, 부모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를 말했던 순간순간이 떠올랐다. 태하와 뱃속에 있는 아이를 똑같이 사랑해야 할 텐데, 혹여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 핏줄과 핏줄이 아닌 자식을 다르게 대해 태하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벌써부터 이른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심란한 마음의 정체를 찾지 못한 채 선아는 상민과 만나기로 한 병원 앞에 도착했다.
쿵쿵. 쿵쿵. 쿵쿵. 친구들이 SNS에서 ‘임밍아웃’ 할 때 올려서 여러 번 본 적 있는 아기집 사진을 보며 태아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은 선아는 이 순간을 갈망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인공 수정 과정에서 힘이 들 때마다 배 속에 아기집이 생긴 모습을 머리로 그리며 고통을 잊으려 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감동이었다. 동시에 낯 모르는 태하의 생물학적 엄마가 떠올랐다. 그녀가 태하를 초음파로 처음 만난 순간은 기쁨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이름 없던 태아 시절 태하의 심장도 이렇게 쿵쿵 뛰었겠지?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경이롭다. 열 달 품은 자식이든, 마음으로 빌고 빌어 찾아온 자식이든 제 손으로 키우는 존재는 고귀한 스승이다. 산모 수첩과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든 상민이 말했다.
“우리 케이크 사서 갈까? 태하한테는 동생이 생긴 날이고, 우리 한테는 둘째가 생긴 날이니 축하 파티해야지.”
“그래 좋아. 태하가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로 사 가자. 무알콜 샴페인이랑 뽀로로 음료수도 사고.”
태하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아는 뱃속 아가를 유모차에 태우고 태하 손을 잡고 상민과 넷이서 나란히 산책하는 해질녘 풍경을 그렸다. 상민은 태하가 여동생을 뒷자리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상상했다. 서쪽 하늘에서 해가 붉은 빛을 떨어뜨리니 동쪽 하늘에서 보름달이 얼굴을 드러냈다. 붉고 노란 빛이 닿은 두 사람 얼굴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