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은 한석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집안의 조 씨들이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잠에서 깬 한석이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하는 인기척을 들은 유경은 서둘러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진 렌터카를 보며 유경은 속으로 말했다. 그깟 차가 뭐라고. 그럴 거면 평생 차만 끌어안고 살지 왜 결혼했어?라고.
사흘 전 일이다. 주 2일 도자 공방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한 달 전부터 초벌구이와 밑그림 그리기, 페인팅, 유약 입히는 과정을 거쳐 1250도에서 재벌 하여 나온 도자기 그릇 세트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유경은 아침부터 마음이 들떴다. 공방은 자차 없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평소 유경은 버스를 타고 가서 적당한 곳에 내린 다음 걸어서 공방에 도착했다. 택시 잡기도 어려운 곳이지만 머그컵 정도야 가뿐하게 가방에 챙겨 들고 걸으면 되니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받아 들게 될 도자기는 밥그릇 네 개에 국그릇 네 개, 다양한 크기의 접시가 다섯 개, 머그컵이 네 개였다. 만드는 과정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아 유경의 어깨가 한뼘 올라갔다. 직접 만든 도기 세트에 정갈하게 담은 음식을 한 상 차려내어 가족들에게 먹일 생각만으로도 유경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한석은 차 키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했다. 뽑은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새 차였다. 들고 와야 하는 도기가 많고 택시 잡기도 어려운 곳이라 차를 가져가지 않으면 답이 없다고 유경이 설득해도 한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말에 같이 공방에 가서 가져오자.”
“안돼. 이번 주말에 선생님 공방 오픈 안 하셔. 가족 여행 간다고 카페 문도 닫는다고 하셨어.”
“그럼 다음 주말에 가면 되잖아.”
“그때까지 못 기다려. 내가 도기세트 완성되길 얼마나 기다렸다고. 그거 셀프 생일 선물이야. 일요일이 내 생일이잖아. 날 위한 생일 선물 찾으러 간다는데, 그래도 차 키 안 줄 거야?”
강력한 한 방이었다. 아내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들먹거리는데도 강하게 소신을 밀고 나가는 남편은 현시대를 무사히 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한석은 흠집이 나지 않게 조심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유경의 친구들 사이에서 애처가라고 소문이 나 있는 한석의 진실은 애차가다. 차를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친구들은 '그것 말고는 속 썩이는 거 하나도 없는 데다가 우리 나이에 너만큼 남편한테 사랑받는 여자가 흔하겠냐'라며 유경의 고민을 일축해버렸다.
신혼 때부터 한석은 가정적이고 다정했다. 회식 날이면 술은 입에 대지 않고 1차가 끝나면 집으로 왔다. 사회생활할 줄 모르는 샌님이라며 쑥덕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석의 업무처리 능력은 술자리 논란을 잠재우고도 남았다. 직장에서 한석은 함께 일하기 좋은 동료이자 회식은 1차만 참석하는 사람으로 굳어져 누구도 더 이상 입을 대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뛰어난 업무 성과를 내다보니 그의 칼퇴를 막는 자도 없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시절에도 항상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들 육아와 공부를 챙기는 한석 덕분에 전업 주부 유경의 삶에 - 당시 전업 주부로 아이를 키우던 친구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 여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이들이 조금 크고 주 5일제 회사가 늘어나 주말 근무가 줄어들자 친구 남편들의 눈이 낚시, 배드민턴, 자전거, 골프 등 취미 생활로 돌아갔다. 아내와 함께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돌봐야 하는 가정이 없는 것처럼 저 혼자 신나게 취미 생활을 즐겼다. 이쯤 되니 남편은 우리 집의 하숙생이고, 애정은 남의 이야기가 된 지 오래며, 남편과 나 사이는 믿을 수 있는 경제 공동체일 뿐이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독보적으로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고, 주말마다 남편과 여행을 다니는(아이들은 이제 청소년이라 주말에는 부모보다 친구와 놀길 원한다) 유경을 부러워했다.
유경은 한석의 유일한 취미가 세차인 줄 알았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차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남편 때문에 피곤한 적도 있었지만 유경도 지저분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더러운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중고로 산 구형 차였기 때문에 한석이 부지런히 세차하지 않았다면 볼품이 없어 차에 탄 자신마저 초라해질 것 같았으니 다행이었다.
주위에서 이제 새 차로 좀 바꾸라고 닦달해도 아직 멀쩡하다며 차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인척 하더니 7년 전 한석은 출고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새 차 같은 중고 독일차를 일시불로 샀다.
한석은 매일 퇴근 후 삼십 분을 들여 차를 돌보았다. 오래된 차에 무슨 정성을 그렇게 들이냐며 주위 사람들에게 받았던 핀잔이 재능으로 돌아왔다. 셀프 세차는 기본이고 한 달에 두 번 이상 직접 광택제를 발랐다. 매일 아침 새 차처럼 빛나는 애마를 주차장에 두고 출근하는 한석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한석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어떤 날은 오 분 이상 차 곁에 머물며 구석구석 살폈다. 유경은 베란다에서 차 곁을 떠날 줄 모르는 한석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비가 오는 날 차에 탈 때 유경의 가족은 각자 비닐 지퍼백 한 개와 마른걸레 한 개를 챙겨 나갔다. 자신이 발을 디딜 자리에 먼저 마른걸레를 펼쳐둔 다음 비에 젖은 발을 마른걸레 위에 올려 물기를 닦고, 젖은걸레는 가져온 비닐봉지 안에 각자의 우산과 함께 담는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마른걸레를 차 바닥에 계속 깔아 두면 어떻겠냐고 딸아이가 제안했지만 한석은 차에 쉰 내가 퍼질 수 있으니 안 된다고 했다. 차가 가족을 모시는 건지, 가족이 차를 모시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림이 연출되었다.
유경이 사는 구형 아파트의 특성상 주차장은 지상뿐이었고, 저녁에는 이중, 삼중 주차를 하는 게 다반사였다. 주차된 차가, 이중 주차된 차를 밀어 출구를 확보한 다음 자신의 차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곡예하듯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한석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세차를 해봤자 바깥 먼지 때문에 금세 더러워졌다. 비가 오면 차를 타고 내릴 때 바닥 시트가 더러워지는 것도 걸레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유경은 2년 후 이사 가기 위해 분양받은 새 아파트를 팔고 전용 주차장이 있는 단독주택을 사자는 한석의 제안에 설득당했다. 유경은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애견 깜지가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스무 개가 넘는 매물을 살펴보고도 한석은 마음에 드는 집이 없는지 아쉬워했다. 게 중 가장 나은 집을 사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했다. 주방과 마당의 일부를 연결해 지붕과 투명한 유리벽이 있는 주차장을 만들었다. 주차를 하면 곧장 주방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장을 봐서 집안으로 식재료를 들이기에 좋은 구조라 유경도 찬성했다. 한석의 큰 그림은 알지 못하고..
한석은 이제 식사 때에도 차를 바라보았다. 차(car)를 보며 밥을 먹고, 차(car)를 보며 차(tea)를 마셨다. 차를 바라보는 한석의 눈에 하트가 떴다. 유경이 주방에서 요리와 설거지를 할 때 한석은 주차장에서 차를 가꿨다. 그 꼴을 라이브로 직관하니 유경의 속에서 천불이 났다. 자신이 함께 사는 사람이 남편인지 차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한 달 전, 한석은 아껴 모시던 어여쁜 차를 연식 대비 좋은 가격에 팔고 꿈에 그리던 새 차를 샀다. 이번에도 독일 차였고, 일시불 구입이었다. 알뜰하게 돈을 잘 모아 목돈을 만들고, 목돈으로 주식 투자를 잘해서 생긴 돈이었다. 오십 줄에 첫 새 차 구입이었다. 여태껏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위해 선물하고 싶다는 한석의 말에 유경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한석이 주방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집에 있는 동안은 차를 볼 수 있는 주방에만 머물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한석은 주차장에 고압 먼지떨이 호스를 마련했다. 차에 타기 전 고압으로 각자 신발의 먼지를 털고 차에 타라는 뜻이었다. 바뀐 새 차가 너무 좋다며 한석만큼 좋아하던 아이들도 유난스런 아빠의 차 사랑에 '아빠는 자신들보다 차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주말에만 차를 탔으니, 한석이 새 차에 시승한 횟수가 열 번도 안 되었을 때 유경이 사고를 냈다. 좌회전 불가 차선인 줄 모르고 좌회전을 하다가 안쪽 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던 차와 부딪힌 것이다. 상대차의 앞 좌석 오른쪽 문에 스크레치가 생겼고, 한석의 차는 왼쪽 앞 범퍼가 훼손되었다. 유경의 과실이 명백하게 커서 상대방에게 물어줘야 할 돈이 많은 데다가 한석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새 차가 정비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천만 다행히 차에 싣고 오던 유경의 도기 작품은 다치지 않았다. 상대 운전자도 유경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한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유경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난 이제 죽었다.라는 말이.
유경은 보험회사에 연락한 다음 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석은 유경의 안위는 묻지도 않고 차가 괜찮은지부터 물었다. 안 괜찮다고 말하자 한석은 화를 냈다. 그래서 내가 주말에 같이 가자고 했잖아! 유경은 그림자까지 쪼그라들었다.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사고가 났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한석의 호통을 계속 듣고 있자니 유경의 속에서 점점 무언가가 끓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사람이 안전하기 위해 비싸고 튼튼한 차를 타는 거 아닌가? 좋은 차를 탔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멀쩡하면 감사하고 다행인 일 아닌가? 나는 왜 어깨를 움츠리고 죄인처럼 이러고 있으며 한석은 뭣이 중헌데 사고로 놀란 내 마음과 몸의 안부는 묻지도 않는단 말인가? 나는 지금껏 차 껍데기랑 살고 있었나? 유경의 머리에서 퓨즈가 툭 하고 끊겼다. 한석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유경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유경은 보험회사 직원에게 한석의 전화번호를 넘기고 앞으로 보험처리 관련 모든 일은 한석과 통화해 처리하라고 말했다. 보험회사에서 보내 준 렌터카를 타고 집으로 온 유경은 드레스 룸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한석이 석고대죄할 때까지 말을 섞지 않고 마주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밖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배가 고파진 유경은 그제야 지갑도 챙기지 않고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생일 아침부터 조 씨들 아침밥이나 차리고 밖을 전전하고 있자니 유경은 서글퍼졌다. 자식들이 엄마의 생일 파티를 준비해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경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언제나 한석의 차가 먼저 맞아준다. 차 수리가 끝났는지 유경이 집을 비운 몇 시간 사이에 렌터카가 떠나고 한석의 애차가 돌아와 있었다. 유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를 째려보았다. 원수 같은 차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집이 조용했다. 설마 오늘이 유경의 생일인 줄도 모르고 자기만 빼고 외식을 하러 나간 건가? 설마? 그런데 집이 왜 이렇게 캄캄하지? 유경은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도둑처럼 발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습관처럼 주방 쪽을 향했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렸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는 암막 커튼이 걷히면서 사위가 밝아왔다.(앞서 얘기했듯 주차장의 차를 보기 위해 주방과 주차장 사이 벽이 투명 유리로 되어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구조라 주방 입구에 커튼을 설치해 외부에서 거실로 통하는 시야를 차단할 수 있다.)
차 사고가 난 날, 유경이 무사히 데려온 도자 그릇에 한석이 실력 발휘한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여전히 뾰로통한 유경이 한석과 눈을 마주치지 않자 아이들이 억지로 유경을 자리에 앉혔다. 생일 상에는 한석이 맞춤한 듯한 케이크도 놓여 있었다. 케이크에는 ‘여보 미안하고 사랑해’라는 레터링이 들어가 있었다. 유경은 속이 오글거리면서도 굳은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유경이 케이크의 촛불을 끄자 한석이 미리 준비한 꽃다발과 선물, 편지를 전해 주었다. 편지에는 아이들 앞에서 한석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구구절절한 사과가 담겨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차보다 손유경을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는 믿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을 보고 유경은 편지를 덮었다. 유경은 배가 너무 고팠다. 맹세를 깨뜨려도 어쩔 것인가. 일단 속아주는 것이다. 속지 않고 어떻게 이십 년을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늘 진실만 말하고 살 수는 없는 법. 보험 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한석의 차가 처음 집에 오던 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주차장에 서 있다. 유경은 가족 모두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요일 점심의 여유와 행복을 즐기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