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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의봄 Oct 11. 2022

결혼 생활의 기쁨과 슬픔(27화-정재혁)

당신의 결혼 생활은 안녕하신가요?





  0.5mm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다. 매의 눈으로 간격을 살피고 톱날이 지나갈 곳을 목공용 연필로 표시한다. 날카롭고 빠르게 돌아가는 톱날을 가운데 두고, 양쪽 손으로 나무를 단단하지만 섬세하게 붙잡고, 연필선을 따라 움직일 준비를 한다. 전원 스위치를 켜면 동그란 칼날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옛날 어른들이 말했다. 전기 톱날이 돌아갈 땐 단 하나의 잡생각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나무와 칼날, 미리 그려둔 선에 모든 신경을 곧추세운다. 원하는 대로 나무가 잘려나간 절단면의 먼지를 목공용 장갑을 낀 둔탁한 손으로 툭툭 털어낸다.


  재혁은 오일스테인을 바르고 말린 편백나무 선반을 집으로 가져와 작은 방에 설치했다. 선반 위에는 해외에서 한 달의 시간을 보내다가 힘겹게 재혁의 손에 들어온 새 피규어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미 세팅되어 있는 피규어들이 오 센티미터 간격으로 놓여 있다. 새 피규어들도 정확히 오 센티미터 간격을 유지한다. 예쁜 아가들(재혁은 피규어를 아가라고 부른다)의 독사진을 찍고 두 걸음 물러서서 그동안 수집하고 선반에 올려둔 피규어들을 살펴보았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은 바로 이런 것! 재혁은 방금 찍은 피규어 사진을 친구 벤자민에게 보냈다. 벤자민은 눈을 반짝이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내일 아가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말했다.

  "오빠! 밥 먹으러 나와. 찌개 다 식겠어."

  아내 목소리에 재혁은 가장 예쁜 아가에게 마지막 시선을 주고 주방으로 나왔다.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재혁은 앞치마를 둘러멨다. 이 집에서 재혁이 피규어를 모셔두는 작은 방만큼 공을 들여 관리하는 공간이 주방이다.








  주방에는 같은 디자인, 다른 컬러의 수세미가 세 개다. 하나는 설거지용, 하나는 개수대 청소용, 하나는 음식물 거름망 청소용이다. 재혁에게 설거지의 완성이란 거름망까지 새것처럼 씻은 후 싱크대 주변의 물기를 완벽하게 닦고 마무리한 수건을 세탁실에 가져다 두고 새 수건을 꺼내 싱크대 수건걸이에 걸어둔 상태다. 재혁의 아내 민지는 설거지만 해둔다. 그릇을 다 씻어 식기 건조대에 올려두면 끝이다. 개수대에 거품이나 음식물 찌꺼기가 남아 있어도 괘념치 않는다. 음식물 거름망은 당연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물며 거름망과, 거름망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싱크대의 내밀한 곳에 곰팡이가 서식한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민지의 설거지를 지켜보며 잔소리를 더하던 재혁은 민지에게 역할 분담을 제안했다. 주방 청소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민지는 다른 곳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민지와 재혁은 더러움의 민감도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민감도가 높은 사람이 더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당연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듯 더러워서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청소를 더 많이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혁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민지는 민이와 함께 샤워를 했다. 물기를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민이가 욕실에서 먼저 나왔다. 욕조에서 웬만큼 닦고 나오는 거라고 몇 년째 가르치고 있지만 민이의 샤워 담당 민지가 바뀌지 않으니 민이는 제 엄마가 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한다. 욕조에 샤워 커튼이 달려 있으면 뭘 한단 말인가. 대체 샤워 커튼이 있는데도 커튼을 치지 않고 샤워를 해 거품이며 물로 욕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두는 민지의 무심함을 재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민이가 끌어안고 나온 수건을 재혁이 낚아 채 민이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얼른 닦았다. 곧 욕실 문이 열렸다. 재혁의 예상대로 욕실 바닥이 엉망이었다. 민지는 재혁의 눈치를 보며 스퀴즈를 집어 들었다. 아직 물공격을 받지 않은 변기 앞 발판을 밖으로 꺼내고 민지는 스퀴즈로 바닥의 물기를 한 곳으로 모아 배수구로 보냈다. 바닥용 마른걸레를 가져와 욕실 바닥을 닦고, 자신의 몸을 닦은 수건으로 욕조 바깥쪽의 물기와 세면대의 물기를 닦았다. 재혁의 마음에 쏙 드는 수습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줄도 모르고, 그 상태로 나오면 뒷사람이 욕실을 사용할 때 얼마나 축축하고 불편한지 모르고 몸만 빠져나오던 예전의 민지와 비교하면 커다란 발전이었다. 재혁은 좀 있다 자신이 샤워를 한 다음 미흡한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민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민이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려던 재혁은 우당탕탕 주방 집기류를 때려 부수는 것 같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재혁은 주말 아침부터 윗집에서 부부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을 때 매캐한 냄새를 느꼈다. 타는 냄새다! 집에 불이 났나 보다! 재혁은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침실 밖으로 나갔다. 주방에 연기가 자욱했다. 개수대에는 음식물과 탄 냄비가 어지러이 쓰러진 채 수전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 폭포를 맞으며 식고 있었다. 민지는 앞뒤 베란다 창문을 열기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재혁은 그런 민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부주의한 사람이다. 덜렁대는 모습이 귀엽고 매일 따라다니며 챙겨주고 싶었던 건 화장실 들어가기 전의 마음이었다. 결혼 후 하루에 하나씩 사고를 치는 민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 재혁은 지쳤다. 아이가 일곱 살이다. 민지 나이도 불혹이다. 이제 달라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불을 내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인지... 재혁은 뒷골이 땅겨옴을 느꼈다. 재혁은 손으로 뒷목덜미를 주물러 스트레스 지수를 떨어뜨린 다음 민지를 아직 자고 있는 민이 곁으로 보내고 전쟁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냄비는 과탄산소다로도 살려낼 수 없는 처참한 상태로 제 명을 다 한 모습이었다. 재혁은 냄비와 개수대에 내동댕이쳐진 음식물을 처리하고 아침 식사 준비에 나섰다. 어떤 재료로 뭘 만들어 볼까? 냉장고를 매의 눈으로 스캔하는데, 어디선가 썩은 냄새가 풍겼다. 연이어 재혁의 눈에 불투명한 흰색 봉지 하나가 들어왔다. 봉지를 집어 들었다. 물컹. 기분 나쁜 촉감이었다. 재혁은 봉지를 개수대에 가지고 왔다. 곧 벌어질 일을 예감이라도 한 듯, 재혁은 코로 들어가는 공기를 차단하고 입으로 숨을 쉬며 봉지에서 얼굴을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손으로 봉지를 끌렀다. 오징어가 상했다. 오징어가 들어있는 봉지에 왜 새송이 버섯이 있는지? 새송이 버섯에는 골고루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재혁은 아까 모아둔 탄 음식물 위에 썩은 음식물을 쏟아붓고 음식물 쓰레기통 뚜껑을 닫은 다음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갔다. 이웃과 마주치지 않길 바라며 1층 분리수거장의 음식물 수거함에 쓰레기를 투척했다. 아침부터 보고 싶지 않은 꼴과 마주한 재혁은 총알을 장전하는 사수처럼 민지를 겨냥할 단어와 문장을 재빠르게 준비했다. 때마침 민지는 잠에서 깬 민이와 함께 거실에 나와 있었다. 재혁은 민지를 향해 따발총을 쏘기 시작했다. 따발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사람 그 누구인가. 민지는 한 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잔소리 좀 그만해!"     


  재혁은 화가 가라앉지 않아 어깨를 들썩이며 아침 식사를 마련했다. 다툼은 다툼이고, 끼니때 밥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게 재혁의 지론이다. 방 문을 걸어 잠근 민지에게 밥은 먹으라며 소리를 쳤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재혁은 민이와 둘이서 아침 식사를 했다.







  점심때에는 초대받은 벤자민 집에 가야 했다. 목수인 재혁은 벤자민의 신혼집 리모델링 공사를 하며 공통 관심사 덕분에 벤자민과 친해졌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민지도 벤자민 부부와 만나서 대화 나누는 시간을 좋아하기에 두 가족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편이다. 오늘 만남의 목적은 새로 들인 재혁의 피규어들을 벤자민에게 구경시켜 주고 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다. 재혁은 우리 다툼 때문에 상대방과 한 약속을 어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말로 민지를 설득했다. 민지는 부루퉁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누가 봐도 민지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른 민지,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한 재혁을 본 벤자민은 두 사람이 다툰 이유를 듣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진 씨도 청소 안 해요. 사람은 안 변해요."


  벤자민의 아내 은진과 민지는 미리 입을 맞춰 연습이라도 한 듯 두 남자를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다 큰 어른이 인형을 수집하고 매일 먼지를 털며 예뻐하는 모습이 얼마나 비호감인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보다 피규어가 훨씬 비싼 거 알면서도 그들의 취미 생활을 인정하고 묵인해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하냐는 것이었다.   

  은진과 함께 한바탕 목에 핏대를 세운 민지는 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어졌는지 얼굴이 편안해졌다. 벤자민과 재혁도 자기네들이 잘못했다며 마나님들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썼다. 민이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연극을 보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벤자민의 애견을 쓰다듬고 있었다.

  벤자민의 집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재혁과 민지를 향해 벤자민이 말했다. 우리가 만약 똑같은 사람과 만났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깔끔한 사람과 깔끔한 사람이 만나 사는 집은 얼마나 숨이 막히겠냐고. 부부 모두 피규어 수집이 취미라면 그 집의 가정 경제는 어떻게 되겠냐고.

  벤자민의 말이 옳았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취향과 습관과 허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상대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채워주기 위해 결혼한 것이지 자신의 복제품을 원한 것은 아니다. 재혁은 자신만 참아주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민지도 재혁의 많은 부분을 참아주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이가 말했다. 벤자민 아저씨는 참 멋진 것 같아. 재혁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빠보다 키가 크고 잘생겼는데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재혁은 민이 표정이 진솔해서 서운했다. 재혁도 민이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민이 말을 그저 어린아이가 하는 의미 없는 말로 치부할 수 없었다. 재혁은 자신보다 늦게 결혼을 하고 한국 문화에 익숙지 않은 벤자민에게 오늘 인생의 한 수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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