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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의봄 Sep 27. 2022

결혼 생활의 기쁨과 슬픔(23화-신휘)

당신의 결혼 생활은 안녕하신가요?





  "어디야? 데리러 갈게."

  "응? 여기가 어디지? 오빠 나 추워. 서율이는 자?"

  "당연히 자고 있지. 지금 몇 시인 줄은 알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아.. 춥고 졸려.."

  "어디야? 간판 보고 어서 말해. 바로 갈게."


  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과 차키를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소라면 집에서 10분 거리인데 늦은 시간이라 신호 한 번 걸리지 않고 5분 만에 도착했다. 원영이가 말한 가게 앞에는 원영의 직장 동료로 보이는 여자 한 명에 남자도 한 명이 함께 있다.

  '저 사람들 다 데려다 주라는 말인가?'

  휘는 작은 한숨을 포옥 내쉬고 비상 깜빡이를 켠 다음 원영이 앞에 차를 세웠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 실례 좀 하겠습니다."

  원영의 직장동료 1이 말했다.

  "택시가 안 잡혀서.. 저도 실례 좀 하겠습니다."

  직장동료 2가 말했다.

  "오빠, 이쪽은 A아파트고 이쪽은 우리 집 근처야. A아파트 먼저 들렀다 가자."

  원영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단잠에 빠졌다.  


  '내가 무슨 대리운전기사도 아니고 진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저만 잠들면 내가 얼마나 불편할지 생각 안 해? 으휴. 말을 말자..'


  1이 내리고 2만 남았다. 아내는 갸르릉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고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건장한 남성만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아마 저쪽은 어색함을 깨기 위해 할 말을 찾고 있으리라.

  "원영 이, 남편 분은 술을 안 드신다고 하던데요. 정말이에요?"

  "아 네. 알코올 분해력이 없는 몸이라서요. 원영이는 술 잘 마시죠?"

  "분위기 메이커죠. 술자리에 없으면 재미없는. 학교에서 인정하는 꾼이죠."

  눈치 없는 남자다. 저 사람이 새로 왔다는 주무관인가 보다. 술꾼 아내를 둔 죄로 이 시간에 운전대를 잡고 아내의 직장 동료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있는 남자에게 할 말이 무엇이고 안 할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놈은 가까이해선 안 된다. 내일 원영이가 제정신일 때 꼭 당부하리라.

  "아 네. 여기 맞나요?"

  "네. 편안하게 잘 왔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원영의 직장동료 2가 차에서 내린 다음 문을 닫고 갔다. 여전히 원영은 고양이 같은 숨소리를 내며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다. 휘의 목구멍까지 화가 차오른다. 주차 후 원영을 겨우 흔들어 깨웠다. 원영은 제 몸무게의 절반쯤을 휘에게 의지해 가까스로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뻗었다.


 


 



  휘는 대학 때 교양 강의실에서 원영을 처음 만났다. 첫눈에 원영에게 반한 휘는 함께 강의를 듣던 같은 과 동기 태식을 제쳐두고 원영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 필기를 빌리고, 고마움의 표시로 밥을 사면서 원영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알고 보니 원영은 경영학과 퀸이었다. '퀸'의 기준은 외모가 아닌 술이었다. 그렇다고 원영의 외모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휘가 첫눈에 반한 외모였다. 원영의 술자리 톤 앤 매너는 외모에서 발하는 빛을 넘어선 것이었다.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남자가 반전 술 실력을 가진 여자의 남자 친구로 살아가는 처세법을 글로 쓰면 책 한 권 분량이 나올 것이다. 그간의 일화를 몇 개만 털어내도 사람들은 휘에게 엄지를 척 내민다.


 





  원영을 알게 된 대학교 3학년부터 밤 시간의 절반은 술에 취한 원영을 데리러 가는데 썼다. 원영이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갖고 있는 날이면 휘는 비상 대기조처럼 원영이 놀고 있는 술집 근처로 가 있었다. 처음에는 유리알 같은 원영을 누가 함부로 건들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원영은 휘가 늘 자신을 데리러 와주는 것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놀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두 사람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날은 어땠던가. 스파게티로 시작해 영화를 보거나 사진을 찍는 식으로 심심하게 끝나는 날이 없었다. 1차가 스파게티면 2차는 파전에 막걸리였다. 1차가 삼겹살이면 원영은 1차부터 술을 마셨다. 휘는 사이다 한 병을 시켜 소주잔에 따라 마셨다. 원영은 거나하게 취할수록 안주에 손을 대지 않았다. 휘는 긴긴 술자리를 버티기 위해 안주를 열심히 먹어댔다.(이런 사람에게 술꾼들은 '안주빨을 세운다'라며 구박을 한다) 술은 원영이 다 먹는데 살은 휘가 다 쪘다. 술이 아니라 안주가 문제인 것이다.









  언뜻 휘가 원영의 머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러했다면 두 사람은 결혼생활 10년 차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원영은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평소에 무뚝뚝하고 애교가 없었다. 선머슴 같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지만 술을 마시면 180도 돌변했다. 술에 취한 원영의 눈에는 하트가 쏟아졌다. 평소에 안 하던 애정표현까지 해서 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휘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좋았다. 같은 과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땐 정말로 '술꾼'의 면모만 보여서 함께 술 마실 맛이 나는 전우 같은 사람이었다. 알코올 농도가 짙어진 눈으로 자신에게만 매력을 발산하니 그런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영이 서율이를 임신한 동안 술에 취했을 때만 발산하는 특유의 애교를 보여주지 않아 어서 출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대학 동기 태식과 만났다. 전날 원영은 술에 진탕 취해 들어와 점심때가 되어서야 살아나기 시작했다. 휘가 숙취 해소 약과 해장국을 사다 날랐다. 원영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피곤해 보였다. 저녁 약속 때문에 서율이를 원영에게 맡겨두고 나오면서도 휘는 영 찜찜했다.

  "뭐 불편한 거 있어? 좌불안석인데?"

  태식이 물었다.

  "그래 보여? 어제 원영이가 술을 많이 마셔서 겨우 살아나는 거 보고 나왔거든. 카톡 확인도 안 하는 게, 다시 뻗은 건 아닌가 싶어서. 서율이 밥을 챙겨놓고 나올걸 그랬네. 술은 언제까지 마실 런지. 자기가 아직도 20대인 줄 아나 봐."

  "좋게 생각해. 여자들은 출산하면 체력이 확 떨어져서 예전에 술 잘 마시던 사람도 잘 못 먹게 된다던데. 원영 씨는 체력이 좋나 봐. 좋아하는 술 마시려고 운동하는 사람도 있더라. 운동하면서 체력 관리하고, 즐겁게 술 마시고, 그러면 되지. 인생 뭐 있냐? 옆에 있으면 좋은 거야."

  휘는 괜히 아내와 사별한 태식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은 것 같아 멋쩍어졌다.  

  "요즘 직장 생활은 어때?"

  휘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고기를 굽는 데 집중했다. 맛있게 잘 구워진 고기를 집어 태식의 앞접시에 연신 가져다주었다.


 




 


  생각해보면 원영도 변했다. 하루 걸러 술을 먹던 사람이 이제 일주일에 한 번만 마신다. 육아에 지칠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캔 맥주 하나를 따서 텀블러에 넣어 새우 과자와 함께 마신다. 한 달에 한 번은 술에 진탕 취해 휘가 데리러 가곤 한다. 실컷 부어 마시며 스트레스를 푼 원영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휘와 서율에게 천사 같은 아내와 엄마가 된다. 원영이 날을 세우거나 짜증이 느는 것 같을 때에는 휘가 오히려 권하기도 한다.

  "원영아, 술 한 잔 하고 오지 그래? 술 마실 사람 없어?"

  그럼 원영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서율이 혼자 볼 거야? 가끔 혼자 마시는 것도 낭만 있고 좋지. 나갔다 올게."

  바람처럼 사라진 원영의 빈자리를 볼 때면 휘는 원영에게 미안해졌다. 자신이 술을 마실 줄 안다면 원영의 영원한 술친구가 되어 줄 텐데. 언제부터인가 원영은 안주만 먹는 휘를 보면 술맛이 뚝 떨어진다고 말했다. 차라리 혼술이 더 낫다고. 그 말이 휘에게 상처가 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안다. 휘에게는 술자리에 앉아 시간을 버티는 게 스트레스다. 원영은 눈앞의 사람이 술은 마시지 않고 안주만 먹는 게 싫다. 그러니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 모두에게 윈윈인 것이다.  


 




 


  네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올해 함께 건강검진을 받았다. 휘는 내심 원영의 간이 걱정되었다. 일주일 뒤 건강 검진 결과가 메일로 도착했다. 원영의 검사 결과는 휘의 메일로, 휘의 결과는 원영의 메일로 받도록 해두었다. 회사에서 원영의 검사 결과를 본 휘는 놀라고 안심했다. 올 A였다. 술을 좋아하던 원영의 대학 졸업 평균 학점과 같았다. 귀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술 실력, 술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높은 학점, 잦은 음주에도 건강한 신체. 휘는 원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건강검진 결과 전부 A야. 축하해."

  "꺄아!! 메일 온 줄도 몰랐어. 나도 들어가 볼게."

  휘는 숨죽여 원영의 말을 기다렸다.

  "음... 오빠 내장 지방이 경도 비만이고.. 심혈관 쪽 추적 검사 요망이라고.. 운동해야 된대."

  불안했던 휘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역시 술이 문제가 아니라 안주가 문제인 것이다. 술도 안 마시면서 뭘 그렇게 먹어댔을까. 지난 식습관을 잠시 반성해 보았다.

  "우리 같이 운동하자. 서율이 자전거 탈 때 우리는 뛰는 거야. 오빠는 내장 지방 줄이고, 나는 건강 잘 유지해서 즐겁게 술 마시고. 콜?"

  "콜!"

  '인생 뭐 있냐? 같이 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거면 된 거지!'

  휘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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