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분명히 제 옆에서 게임하며 얘기하고 있었는데 잠깐 조용해서 옆을 보니 준우가 없어요. 보이는 곳은 다 둘러봤는데 없어요."
선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해져 연신 손으로 제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괜찮아. 캠핑장 안에 있을 거야. 휴대폰으로 전화해 봤어?"
"폰을 의자에 놓고 갔어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준우가 안 보인다는 선우 말에 벌써 도현은 준우를 찾으러 자리를 뜬 상황이었다. 15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먼발치에서 도현과 준우가 손을 잡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드디어 죄책감에서 벗어난 듯 밝은 얼굴로 준우와 아빠에게 달려갔고 은영은 맥이 풀려 캠핑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준우야 혼자 어딜 갔던 거야?"
"엄마 그게......"
"도현 씨, 준우 어디에 있었어요?"
"꽤 멀리 있는 물가까지 갔더라고요. 무서웠는지 울고 있었어요. 준우 혼내지 마요 은영 씨."
도현의 말에 은영은 준우를 끌어안았다.
"엄마. 흑. 그게. 흑흑. 장수풍뎅이 따라가다가. 어흑. 따라가다 보니 형도 안 보이고 아저씨도 엄마도 안 보여서. 꺽꺽. 으앙."
준우는 꾸역꾸역 참던 울음을 '왕'하고 터뜨렸다. 은영은 준우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말해주었다.
은영과 도현은 은영의 학원에서 만났다. 은영은 미술학원 원장이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부대끼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린 준우만 있었다. 성인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 성인 수채화 기초 클래스를 오픈했는데, 도현은 1기로 참여한 사람이었다. 그림을 가르치고 배우며 두 사람은 서로의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이유 때문에 은영과 도현은 서로를 이해하며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은영은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결혼은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믿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그 마음을 처음에는 밀어냈고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준우가 걱정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경험하며 혼란스러울 아이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선우랑 준우의 나이 차이가 커서 준우가 형을 잘 따를 것 같아요. 선우는 너무 어릴 때 엄마랑 헤어져서 그런지 자기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으니 제발 재혼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 시작해요. 당신도 나도 좋은 사람이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은영은 새로운 결혼 생활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않기로 했다. 이미 사랑해서 죽고 못 살던 사람과 미워서 죽고 못 살게 되어 제 각기 다른 길을 갔다. 지금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의 감정도 유효 기간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마음보다 믿음과 의리로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고, 결혼을 선택하게 한 상대의 장점이 부메랑이 되어 단점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처음 시작은 예전보다 더 힘들겠지만 모두가 적응하면 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현과 선우는 준우에게 좋은 아빠와 형이 되어줄 것 같았다.
새로운 가정이 만들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정의 중심도 부부여야 하지만 아직 미성년인 자식의 안위를 최우선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혼 전 두 가족은 공통의 활동을 통해 조금씩 연대감을 만들기로 했다. 준우와 선우가 처음 만난 곳은 캠핑장이었다. 준우는 엄마 친구 아들인 대연이와 함께 자주 캠핑을 해왔고, 선우는 초등학교 때까지 아빠와 캠핑을 즐겼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토, 일요일 중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아빠와 시간을 보냈기에 야외에서 하는 활동이라면 캠핑이든 자전거 타기든 거부감이 없는 선우였다.
한 달에 한 번 캠핑을 하고, 같은 횟수로 은영의 미술 학원에서 만나 다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식사를 했다. 선우는 그림 그리기 만큼은 함께할 수 없다고 제 아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아빠의 재혼을 누구보다 찬성하며 은영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선우가 그림 그리기 활동에 빠지는 것은 은영도, 도현도 인정해 주기로 했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도현과 준우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두 사람이 함께 완성해야 하는 그림을 제시했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몇 번 가진 후 은영은 준우에게 도현이 새아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예상대로 준우는 혼란스러워했다. 은영은 준우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존중하며 매일 밤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
네 사람이 한 집에 모여 살면서부터 준우는 선우를 선망하며 따랐다.
"엄마 나도 고등학생 때 선우 형처럼 되고 싶어. 형처럼 게임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싶어."
"형이랑 친하게 지내면 그렇게 될 거야."
"형이 나 귀찮아하지 않을까?"
"형도 너랑 잘 지내고 싶을 거야."
다행히 선우는 착한 형이었고 준우는 그런 선우를 좋아했다. 어색하지만 서로 조금씩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섬세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은영의 손길을 반가워했다. 다림질이 되어 있는 교복에 고마움을 표현했고(은영에게 직접 한 것은 아니고 도현을 거쳐서 고맙다는 말이 전해졌다), 아빠가 해주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맛있는 음식에는 밥을 두 그릇씩 먹는 것으로 기쁨을 드러냈다.
학원의 특성상 은영은 점심 식사 후 출근해서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 퇴근했다. 도현은 준우, 선우와 저녁 식사를 한 다음 두 아이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했다. 도현은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님에도 어색함을 깨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말했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현 자신을 필두로 모두가 한 마디씩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에는 아이들의 핸드폰이 있었다.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아이들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시간이 한 달, 두 달 쌓이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갔다.
"너희 둘 다 갑자기 가족이 많아져서 혼란스럽지? 예전 할머니, 새로 생긴 할머니, 예전 삼촌, 새 삼촌.. 사실 아빠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너희 마음을 모두 다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이 두 배 늘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생일에 용돈 주는 사람도 많아졌잖아. 또.... "
도현은 준우와 선우가, 자신이 속한 여러 가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을 적절하게 조정하며 적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준우가 제 친아빠를, 선우가 제 친엄마를 만났다. 은영은 아이들이 떨어져 사는 부모와 만나는 날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그날은 은영과 도현이 데이트하는 날로 정했다. 새로 꾸린 가정의 중심은 부부니까, 아이들이 그리운 존재를 만날 때 은영과 도현은 사랑을 지속시키고 단단하게 만드는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갔다. 어떤 날은 sns에서 2030이 즐겨하는 데이트를 검색해 따라 해보기도 했다.
오늘은 가족회의가 있는 날이다. 치킨 세 마리를 시키고 은영과 도현은 맥주 한 캔씩, 준우와 선우는 콜라를 한 캔씩 땄다. 은영이 먼저 운을 뗐다.
"그동안 가져온 가족 규칙 중 고쳤으면 하는 거 있으면 얘기해봐."
"저녁 산책, 횟수 좀 줄였으면 좋겠어요. 너무 자주 가."
선우가 말했다.
"형 말이 맞아요. 이틀에 한 번으로 줄이면 좋겠어요."
은영은 아이들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그래. 이제 평소에도 대화하는 게 어색하지 않으니까 산책은 이틀에 한 번 하자. 콜?"
"콜!"
"그럼 다 같이 짠?"
넷은 캔을 부딪친 후 음료를 쭈욱 들이키고 치킨을 한 점씩 뜯어먹었다.
"있잖아 준우야. 이제 아저씨 말고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될까?"
준우 얼굴이 빨개졌다. 실은 한 달 전에 은영이 준우에게 한 말이었다. 준우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은영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더랬다. 준우는 치킨을 좀 더 뜯어먹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
"사실은요. 저희 반 친구 중 한 명이 저처럼 엄마가 재혼을 했어요. 친구 이름은 원래 박윤후였는데 이제 김윤후가 됐어요. 진짜 아빠 같은 생각이 들어서 성을 바꿨다고 하기에 저도 그러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제 아빠라고 부를게요. 그리고 저도 형이랑 똑같이 박준우하고 싶어요."
은영과 도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요즘은 부모의 성을 모두 따르며 개명하는 사람들도 있어. 예를 들면 '박'과 '정'을 합쳐 '박정준우'라고 개명하는 방법이 있다는 거야. 그럼 준우뿐만 아니라 선우도 개명을 해야겠지. 어떤 성으로 하는 게 좋을지 다 같이 한 달 정도 고민을 좀 해보면 어떨까?"
도현의 제안에 은영과 준우는 그러겠다고 했고, 선우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럼 나도 하나 제안할게."
은영이 말했다.
"선우야, 어머니 말고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선우도 아까 준우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내 앞에서 친엄마를 엄마라고 말해도 괜찮아. 실수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준우도 아빠가 둘, 너도 엄마가 둘. 그거 엄마랑 아빠는 시작할 때부터 예상하고 받아들인 거야. 네가 구분하려고 친엄마는 엄마, 나는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나 솔직히 좀 서운해. 이제 엄마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선우는 아빠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콜라 캔을 은영의 맥주 캔에 부딪쳤다. 수락의 표시였다.
"그럼 이제 준우는 아빠라 부르고, 선우는 엄마라 부르는 거다? 성은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자. 우리 다 같이 잔 한 번 부딪칠까?"
이제 준우와 선우는 새로운 가정의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한듯하다. 가정의 파이팅이 필요할 땐 잔을 짠하고 부딪치는 게 규칙인 것 같은 새 가정을 받아들인다. 네 사람은 캔을 들어 부딪쳤다. 선우는 치킨의 맛있는 부위를 골라 준우에게 건네주었다. 은영은 닭다리를 집어 선우 손에 쥐어 주었다. 도현이 냉동실에서 살얼음이 낀 맥주를 가져왔다.
"딸깍, 푸쉬쉬."
맥주가 신선한 김을 뿜으며 출항을 선포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은영과 도현은 새 맥주잔을 부딪치고 연이어 꿀꺽꿀꺽 맥주를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