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문자가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정하는 통장을 스쳐 지나갈 월급을 보며 씨익 한 번 웃었다.
‘그래도 월급이 좋긴 좋아.’
열두 시간 공복에도 월급 입금 소식에 배가 불러왔다. 남편 찬형의 월급 날도 정하와 같다. 정하는 찬형의 폰을 열어보았다.
‘언제 월급이 오른 거야? 나한테 말도 안 하더니! ’
정하 직장은 올해 딱 물가 상승률만큼만 임금이 올랐는데 찬형은 그 이상인 듯했다. 정하는, 오늘 저녁은 찬형이 쏘는 걸로 벌써 결정을 내렸다.
정하와 찬형은 결혼한 지 7년이 되었다. 여섯 살과 네 살 딸이 둘이다. 정하와 찬형은 결혼한 때부터 지금까지 월급을 합치지 않았다. 정하보다 월급이 이백만 원 이상 더 많은 찬형은 전세 담보 대출 이자와 각종 공과금, 세금 납부를 맡고 있다. 월급이 들어오면 가정 공용 통장에 생활비와 아이들 양육비를 3대 7 비율로 나눠 입금한다.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정하가 3, 찬형이 7을 맡는다. 그 외의 지출은 각자 알아서 하고 있다. 저축도 각자, 투자도 각자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도 각자 알아서. 그래서 정하는 찬형이 그의 부모님께 매월, 명절 때, 생신 때 얼마의 용돈을 드리는지 알지 못한다.
정하가 육아휴직을 한 기간 동안은 모든 지출을 찬형이 맡고 정하는 찬형에게 용돈을 받아 썼다. 그때의 구차함과 서운함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부부 사이에 돈으로 저렇게 생색을 낼 수도 있구나. 전업 맘인 친구와 맞벌이지만 경제권을 남편이 쥐고 있어 남편에게 용돈을 받는 친구 생각이 났다. 모임 장소나 메뉴를 정할 때 가격을 보며 망설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들 모습 이면에는 가정 내 갑-을 관계로 말 못 할 고민이 있으리라. 어서 복직해서 이 치사한 용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혼하면 월급을 합치지 말자고 제안한 것은 정하였다. 월급을 합치면 둘 중 하나가 돈을 관리해야 한다. 정하든 찬형이든 둘 중 하나는 용돈을 받아 쓰는 처지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노동으로 당당하게 번 돈을 자기 뜻대로 쓸 수 없으면 답답하고 초라할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이 돈 관리를 하겠다고 자처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귀찮았다. 정하보다 월급이 많은 찬형은 그게 자신에게 더 유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서인지 흔쾌히 수락했다.
정하는 결혼 후에도 자신이 번 돈을 자유롭게 썼다. 아가씨 때부터 이어온 - 시즌별로 백화점에서 괜찮은 옷을 두세 벌씩 사는 - 습관을 유지했다. 매월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해 코인과 주식에 투자했다. 코인과 주식 투자로 번 돈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 썼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 찬형이 해주는 선물을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월급을 합쳤더라면 '선물 산 그 돈이 결국 내 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거 살 거였으면 현금으로 주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네 돈과 내 돈의 구분이 명확해야 선물도 의미가 있는 법. 찬형은 2년에 한 번 꼴로 정하에게 명품백을 선물했다. 정하의 명품백이 하나 둘 늘어가는 모습을 보며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나도 월급 합치지 않을 걸 그랬어. 남편이 월급 모아서 선물해주는 기분 느껴보고 싶어. 부럽다.”
정하는 그런 친구들의 시선을 즐겼다.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면 찬형은 현금 카드에 돈을 두둑하게 담아 정하에게 건네주었다.
“얘들아, 우리 남편이 맛있는 거 먹으라고 현금 카드 선물로 줬어. 한 끼는 곗돈 말고 이 카드로 먹자.”
“와! 정하 남편 멋있다. 부러워.”
정하는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갔다. 남편 잘 만났다는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선물의 기쁨을 나눴다.
결혼생활 햇수가 늘어남에 따라 친구들과 대화 주제가 점차 바뀌었다. 결혼 전에는 연애와 결혼 준비에 대해, 결혼 초에는 트렌드에 맞는 가전, 가구 등과 시댁 분위기, 임신 및 출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주로 육아와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나야, 너 돈 좀 벌었겠더라?”
예지가 물었다.
“응?”
“너희 아파트 꽤 올랐던데?”
하나 얼굴에 뿌듯함과 쑥스러움 그 사이의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아... 결혼할 때 대출받아 집 사길 잘했어. 그땐 떨어지는 칼날을 잡은 것 같아 후회됐는데, 평생 내 집 하나는 있어야 될 것 같았거든. 집 한 채면 값이 오르나 떨어지나 다를 게 없다는 오빠 의견을 따랐지. 집을 샀으니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저축하는 셈 치고 갚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집값이 오르고.. 다행이야.”
정하는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씀씀이가 넉넉하지 않은 평소 하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은 그렇게 빠듯하게 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나가 집을 샀었구나. 그 집이 얼마나 올랐기에 예지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대출금 얼마씩 갚아?”
정하가 물었다.
“150만 원 정도?”
“너희 둘 월급으로 월 150만 원 상환하면 한 달 생활이 너무 빠듯하지 않아?”
“빠듯하긴 한데, 그래도 오빠가 알뜰하게 돈 관리를 잘해서 쓸 땐 쓰고 아낄 땐 아끼고 있어. 결혼 전 내 습관대로 돈을 썼다면 지금 한 푼도 못 모았을 거야. 오빠가 엑셀로 고정 수입, 지출을 정리해서 보여 주던데. 쓸데없이 새는 돈이 많았어. 그런 거 관리하니 대출금 갚을 돈이 마련되더라.”
정하는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자기보다 한참 형편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 하나의 자산이 어쩌면 자신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정하는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끌어모아 바닥 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마셨다. 시원한 커피가 평정심을 되찾아주고 있을 때였다.
“우리도 집 샀어.”
예지가 상을 받은 아이처럼 뽐내듯 말했다.
“잘했어. 어디야? 이사할 거야?”
하나가 유주택자로서의 반가운 동질감을 드러내며 예지를 축하해 주었다. 예지는 첫째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둔 경단녀다. 홑벌이로 아이 둘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희는 모를 거라며 늘 징징대곤 했다. 정하는 예지나 하나보다 여유 있는 자신이 한 끼라도 더 사는 게 이십오 년지기 친구들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에 이어 예지까지 집을 샀다고 한다. 어디에서 어떤 집을 샀는지 들어볼 일이었다.
“재개발 들어갈 거라고 소문난 지역이 있어서 전세 끼고 빌라를 샀는데, 재개발이 결정됐고 집값이 두 배 올랐어. 재개발하면 우리가 들어가 살 수도 있고, 그전에 팔 수도 있고. 여러 방향으로 굴릴 수 있을 것 같아.”
정하는 한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진 후 서점으로 가 부동산 관련 책을 샀다.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정하가 그날 산 책을 그날 밤에 독파했다. 다음 날 몇 권의 책을 더 샀다. 주말 내내 육아는 찬형에게 맡겨두고 책만 읽었다. 네 권의 책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 종잣돈부터 모아라. 쓸데없이 줄줄 새는 돈을 막아라. 얼마만큼 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를 모을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정하는 찬형과 마주 앉았다. 친구 예지와 하나가 집을 샀고 집값이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도 수입 관리 방법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경청하던 찬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데 꼭 살아가는 모습이 같아야 할까? 집을 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세로 사는 집이 내 집이라 생각한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잖아? 글쎄.. 나는 집을 왜 사야 하는지 모르겠어. 인구가 계속 줄고 있어서 결국 집값도 떨어질 텐데. 지금 집값이 너무 올라서 거품이라 조정될 거고. 무엇보다 집 마련하려고 즐길 거 못 즐기고 입고 먹을 거 아껴가며 전전긍긍..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지금 아이들 잘 키우면서 각자 번 돈으로 각자가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잘 누리고 있잖아. 나는 지금 이 삶이 좋아. 너도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찬형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리 불안하고 뒤쳐진 기분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하는 찬형이 한 달에 얼마를 모으고 있을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실수령액 560만 원 중 시부모님 용돈은 40만 원 정도일까?(정하는 찬형이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 모른다) 전세 담보 대출 이자가 80만 원에 생활비와 아이들 양육비 200만 원, 공과금 50만 원, 각종 보험료를 납부하고 자신을 위해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를 쓴다고 해도 50만 원은 남는다. 찬형은 남는 돈을 어디에 투자하는 것일까? 노후대비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설마 땡전 한 푼 안 모으고 있다가 나이 들어 나한테 의지하려는 건 아니겠지? 정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