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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민트 Jun 03. 2023

등린이의 무모한 백록담 도전기

01. "이왕이면 관음사 코스"


"이왕 가는 거 험하다는 관음사 코스로 가야지. "

"좋아, 가보자. "


등린이, 겁 없이 해발 1950m 한라산 백록담에 도전했다.

가는 길은 길고 평온한 성판악 탐방로와 한 시간 정도 더 짧지만 가파른 관음사 탐방로 두 가지다. 성판악 탐방로로 예약하려 했는데, 우리가 원하는 날짜는 일찌감치 마감됐다. 엉겁결에 관음사 탐방로로 방향을 틀었다. 관음사 탐방로가 볼거리는 더 다양하다더라 등 급히 알게 된 지식들을 공유하며 마치 원래 의도한 코스인양 합리화했다.   


우리의 완봉 기록은 해발 849m 청계산과 296m 아차산이었다. 청계산 매봉에서, 아차산 정상 표식에서 각각 사진을 찍어 남기고 뿌듯해했다. 한 달에 2번 정도 아차산과 용마산 코스를 3~4시간 정도 오르내리면서 등산에 재미를 붙이고 자신감을 얻었다.


산은 할아버지를 내게 한없이 따뜻한 할아버지로 변신시켜 주던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당뇨병 치료를 위해 매일 산에 오르시던 할아버지를 곧잘 따라다녔다. 할머니가 준비해 주신 간식과 약수를 들고 오기 위한 빈 페트병 두어 개를 짊어지고 말이다. 할아버지가 깎아주는 사과와 콩고물 가득 묻혀준 쑥떡을 먹으면서 나를 향한 애정을 느꼈다.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다는 할아버지 말씀에도 신이 나 뛰어 내려오다가 속도 조절을 못해 미끄러져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 속엔 사랑이 있었다. 가을에는 열심히 도토리를 주워 배낭에 가득 담아내려 왔다. 할머니는 그걸 내리쬐는 가을 햇살에 말려 도토리묵을 해주셨는데, 그 맛이 아직도 그립다.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이 쌓인 터라, 운동을 해보자고 맘먹었을 때 가장 먼저 등산을 떠올릴 정도로 산은 이미 호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산이 좋다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늘 같은 곳에 있는 산이지만 봄이면 새싹, 여름이면 짙은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 등 매번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 사시사철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산마다의 매력도 달랐다. 청계산은 숲이 무성해 피톤치드 속에서 몸이 정화되는 듯했고, 아차산은 올라가면서 한강과 함께 시원하게 펼쳐지는 도심 전경이 답답한 마음을 탁 뚫어주는 듯했다.


등산하는 동안 등줄기와 머리카락을 촉촉하게 적시는 땀은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줬다. 정상에서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은 성취감과 잔잔한 행복을 느끼게 해 줬다. 산을 내려와 먹는 식사는 또 어떠한가. 한껏 돋워진 식욕은 무엇을 먹든 꿀맛으로 만들어줬다.


초짜의 무모한 산 사랑은 겁 없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을 향했다.



02. 초입에서 노루를 만나다


"물 몇 개 가져가시나요? "

오전 8시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예약자 QR코드를 검사하는 직원이 기세등등한 우리를 막아선다. '왜 우리만 막지?' 하는 묘한 억울함과 의문이 순식간에 교차한다.


"500ml 2개요. "

"그것 가지고 안 돼요. 어제도 등산하다가 탈수 오신 분 있었어요. 물 더 사 오세요.  "


족히 10시간은 걸린다는 장시간 등산에 짐이 거추장스러울까 봐, 천 가방에 삼각김밥과 커피만 간단히 들고 왔다. 직원의 눈에는 다른 등산객들과 달리 단출한 복장과 장비의 우리가 무모하고 걱정됐나 보다.


'얼마나 힘들기에 그러지?'

반쯤은 겁이 나고 반쯤은 직원이 우리의 아차산 등반 경력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어 괜한 잔소리싶다. 하지만 전문가말을 듣자 싶어, 맞은편 매점으로 가 물 2통을 더 사서 관음사 코스 입구에 들어섰다.


한라산의 산세는 아차산과는 차원이 달랐다. 뾰족뾰족한 화산 돌에 발목을 삐끗할 수 있기라도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바닥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 보니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초반 30분 정도를 제외하고 계속 이어지는 높은 경사도 힘에 부쳤다. 오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꿈처럼 눈앞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는 노루를 만났다.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온 우리가 신기하다는 듯, 도망가지 않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참 우릴 응시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비로운지.

도랑 사이로 마주한 이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다. 혹여나 도망갈까 한참을 조용히 쳐다보다가 몰래카메라를 들이대봤지만, 모델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



노루를 본 덕에 돌아가려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라산이 더 대단한 선물을 숨겨놓았을 것만 같아 완봉의 각오를 다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03. 하필 최고의 날씨라니


의욕은 금세 꺾인다. 눈앞에 75도 경사의 가파른 데크 계단이 나타난 것이다. 아찔한 경사와 높이에

울며 겨자 먹기로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계단을 기어오르다시피 한다.


이 난이도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면 완봉을 포기해야 할 거 같아.

남편도 내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경이로운 한라산은 곧이어 내리막길을 선사한다.  한라산 등반은 죽을 만큼 힘들 때 겨우 숨통이 트이는 인생 같다는 말이 딱이다.


초반에는 내리막길이 마냥 반갑고 신이 나 뛰어가기도 했다. 하지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내리막길이 나오면 불길해졌다. 그만큼의 오르막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 내리막길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완봉의 꿈을 접을 수 없게 만드는 건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풍경이었다. 발아래 펼쳐진 탁 트인 제주도의 전경과 넓디 젊은 초원,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새파란 하늘이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죽어서도 꼿꼿한 고사목들이 푸른 나무들 사이에서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얀 구름이 발 밑에 있는 경험은 그동안 낮은 산에서는 겪지 못한 한라산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풍경도 종반부의 끝없는 계단 지옥을 이기지 못했다. "포기할래", "그만할래"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험한 길을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계단이었지만, 오히려 흙을 더 밟고 가는 게 쉽겠다 싶다.  끝도 없이 오르는 계단은 끝 부분과 발을 디디는 곳이 어디인지 헷갈려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사람을 지치게 했다.


백록담이 이렇게 깨끗하게 보이는 날씨가 있네.  
최고의 날씨야.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제주도 날씨가 아무리 청명해도 백록담깨끗하게 볼 수 있는 날 많지 않단다. 백록담 부근 날씨가 워낙 변덕스럽고 구름 안개가 많이 껴  못 보는 날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이 백록담 부근의 하늘이 청명해 깨끗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정말 드문 날이란다.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날씨라고 하산하는 이들이 올라가는 이들 들으라는 듯 말한다. 도대체 어느 조상이 그리 덕을 쌓았는지 원망스럽다.



04.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다시는 안 올 거니까 오늘 꼭 보고 가야겠어. 억울해서 그냥은 못 가. "


정상까지 다 왔다는 말을 4~5번 듣고도 백록담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그동안 고생한 게 억울해서라도 그냥은 못 갈 판이다.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다. 내가 먼저 포기하자고 말하기를 은근히 기다리던 서방도 마지못해 같이 오른다. 쓸데없는 악바리 정신이 이런 데서 나온다.


어머나, 너무 아름답다!


더 이상 동원할 오기도 사라질 때쯤, 갑자기 눈앞에 백록담이 펼쳐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한 백록담은 첫눈에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파란 하늘과 그 아래 더 파란 백록담, 발아래 펼쳐진 구름은 5시간이 넘는 내 수고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보고 또 봐도 백록담은 질리지 않았다. 분화구에 찰랑거릴 정도로 물이 차는 것도 쉽지 않다는데,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만수다.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과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안 올라왔으면 어쩔 뻔했느냐""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오늘이야말로 반드시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던 주변 등산객들의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정상석에서 사진 찍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정상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머리 바로 위에 있는 듯한 하늘을 바라보다 보니 1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한라산 완봉이 됐다.



05. 한 번이면 충분해


한라산 정상에서 등산객들은 다양한 음식을 싸와 든든히 배를 채웠다. 그래야 5~6시간의 하산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결에 아침 식사도 대충 먹고 출발한 우리에게는 천가방에 든 삼각김밥뿐이었다. 요깃거리 챙기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한 진정한 등린이였다.


남들이 요기하는 걸 바라보며 부러워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 순간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은 그나마 좀 더 챙겨 온 물을 마시며 얼른 내려가 가장 가까운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것뿐이다. 내리막길은 걸음과 마음에 가속이 붙기 마련이니까 올라온 것보다는 크게 수월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몰랐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는 내려올 때 더 죽을 맛인 걸. 정상 안내소에서는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는 분들은 시간이 더 걸리니 얼른 내려가라"는 방송이 나올 때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다.


뾰족한 바닥돌은 내리막길이라도 단 한걸음을 결코 가볍게 내딛을 수 없게 했다. 오를 때만큼이나 길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목표를 달성한 후 오기가 사라진 상태에서 내려오니 다리는 힘이 빠지고 풀려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산길은 올라올 때처럼 꼬박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죽을 것 같고, 못할 것 같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10시간의 한라산 등반. 끝난 후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선물 받았다. 난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관음사 코스로 다녀온 한라산 완봉 경험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리고 일주일 간의 전신 근육통, 길고 험준한 관음사 탐방로를 한 번 경험했다면 다시는 못 간다는 교훈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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