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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으로 떠나는 날

왜 떠나기 전엔 항상 우울할까

by 사과집

리스본으로 떠나는 날



동남아를 4개월 여행하고 한국에 잠시 머물다, 오늘 다시 리스본으로 떠난다. 인천 공항에는 엄마와 동생과 같이 갔다. 편도 티켓을 끊었는데, 입국 거부를 당할 수도 있으니 포르투갈에서 나가는 교통편을 구하라는 승무원의 말을 들었다. 내가 유럽 여행 준비를 정말 전혀 하지 않았구나… 깨달았다. 의자에 앉아서 마드리드로 가는 삼만원짜리 비행기를 구한 후 다시 수속을 밟았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여행한지 반년이 다 되어간다.


공항에서 엄마는 유독 나를 챙겼다. 기내에 가지고 갈 6키로 크로스백을 굳이 본인이 들겠다며 가져갔다. 내가 들 수 있다고 계속 뺏어도, “넌 어짜피 계속 들고다녀야 하잖아.”하고 도로 뺏었다. 한국에서 머무는 한달 간 엄마와 참 많이 싸웠다. 하지만 공항에서는 자못 감상적이게 된다. 9시간 비행을 하고 경유지인 러시아에 도착 했을 때, 엄마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우리 딸 사랑해~. 원래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항상 극도로 우울해진다. 지난 번 미얀마로 떠나기 전에는…. 혼자여서 그런 줄 알았다. 월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기 전날, 2년을 넘게 살던 집을 모두 비웠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방에서 이동용 목베개를 하고 잤고, 비오는 아침 공항 버스를 타고 처참한 기분으로 공항에 갔다. 하지만 오늘은 안온한 집에서 가족과 따뜻한 밥을 먹고, 스카이캐슬을 보고, 엄마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편하게 공항에 왔지만 그때보다 더 우울하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은, 이 우울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풀릴 얕은 우울이겠지.


왜 항상 떠나기 전엔 우울할까. 출국을 앞둔 일주일간은 그게 더 심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답답해서, 가족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내가 모르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남겨진 것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후회, 그럼에도 떠난다는 내가 도피처럼 느껴지는 순간, 지금 이렇게 가는게 맞는 선택일까- 내 선택에 대한 의문 …. 불확실한 삶을 선호한다며, 예상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싶다며. 책에 분명 그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 모든 우울은 불확실함에서 온다. 이 불안과 우울을 양 팔로 껴앉자.




걱정을 의무처럼 생각하는 악취미



공항에선 인터넷에 ‘편도 입국 탑승 거부’를 검색했다. 리턴 티켓이 없으면, 운나쁘면 입국 거부를 당할 수 있다는 글들을 봤다. 스페인으로 나가는 티켓이 있긴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티켓을 검색하다 그만 뒀다. 무료로 취소할 수 있는 항공권을 찾으면 된다는데, 설마 나도 운나쁘게 걸리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따로 끊지는 않았다. 나는 불안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괜히 초조해했다. 악명 높은 러시아 항공이라 짐을 잃어버릴까봐도 걱정이었다.


경유하는 러시아 공항에서는 인종차별을 당했다. 콜라 하나를 사려는데, 여자 종업원은 그 앞에 있던 서양인 남자에게 웃으면서 계산을 하더니, 내가 콜라를 가져 온 것을 보고는 신용카드를 긁는 기계를 나에게 던졌다. 알아서 계산하고 꺼지라는 거였다. 처음엔 ‘아 설마,’ 라는 생각으로 차분히 카드를 넣었는데. 영수증이 인쇄되서 나오는걸 보고는 다시 또 내게 기계를 던졌다. 던질 이유가 없는데 그냥 화풀이를 하려고 던진 거였다. 당황스러웠다. 뭐지 이 미친년은? 어버버 하는 새 그 종업원은 안쪽으로 들어갔고, 다른 종업원이 와서 대신 영수증을 끊어줬다.


기분이 더러운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탔음에도 삼십분 이상 지연된 비행기를 보고 이러다 새벽에 도착하는 거 아니야,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얘기해야 하나…말할 방법도 없잖아, 혹시 입국 거부 당하는 건 아닐까, 아까 그 미친년은 뭐였나, 포르투갈도 이런 사람이 많으려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만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걱정이라도 해야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신도 믿지 않고, 미신도 믿지 않으면서, 불안을 징크스처럼 여겼다. 내가 걱정을 해서 무사한 건 아닐까, 불안을 의무처럼 생각해야하는 악취미였다.


사람들은 본인에게 통제할 권한이 없다고 느끼면 패턴이 없는 상황에서도 무언가 있다고 느낀다. 야구 선수들은 수비할 때보다 타석에 설 때 본인이 만든 수많은 징크스에 제약을 받는다. 수비수들은 90%정도는 성공하지만, 타자는 열에 일곱법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내가 손댈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고 징크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걱정을 해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거야…


역시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무사히 도착했다. 출입국 심사할때도 몇 달간 있을거냐고 물어보는게 다였다. 짐도 찾았고, 시간도 크게 지연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에어비앤비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상냥한 호스트 비키는 3층 창문으로 나를 지켜보다가 따뜻하게 환대했다.


그렇게 별일없이 리스본에 도착했다.



리스본에서 머문 첫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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