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외환위기", "IMF 사태"라고 불리는 1997년 경제위기는 한국이 외국에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벌어진 일입니다. 외국에서 빌려온 돈도 갚아야 할 돈도 미국 달러였기 때문에 "외환위기"라고 하고, 제때 갚지 못한 돈을 국제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서 빌려서 갚았기 때문에 "IMF 사태"라고도 합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빌려서 갚거나(소위 '돌려 막거나'), 아니면 갚을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죠(소위 '배째라'). 1997년 한국은 전자를 선택했고, 2001년 아르헨티나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만약 한국이 후자를 선택했다면, 즉 아르헨티나처럼 국가부도를 선언했다면 더 이상 국제무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도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친구를 손절하듯, 외국이 한국을 손절하는 것이죠. 더구나 한국은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국제무역의 중단은 곧 경제활동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개인으로 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휴대폰도 쓸 수 없고, 통장이나 카드 같은 은행거래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이 갚아야 할 돈(대외부채)은 1,500억 달러 정도였는데 갚을 수 있는 돈(외환보유고)은 100억 달러 미만이었습니다. 물론 대출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대출도 능력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제때 이자와 원금을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말이죠. 그리고 여기저기서 빌린 1,500억 달러를 한 번에 갚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당시 한국에서 문제가 되었던 건 1,500억 달러의 부채 중에서 당장 갚아야 할 단기부채였습니다. 그래서 IMF에서 빌린 돈도 1,500억 달러 전부가 아니라 당장 필요한 600억 달러 정도였고요.
대출도 능력이다
1990년대 한국은, 아니 정확하게 한국 기업들은 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대출을 받은 걸까요? 당연하게도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국 기업들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돈을 빌린 이유는 외국 은행의 이자율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 은행의 이자율이 7~10%였던 반면, 일본과 미국의 금리는 1~4% 내외였으니까요. 문제는 외환 대출이 대부분 장기대출이 아닌 1년 내외의 단기대출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외국 은행 입장에서는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상환능력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에 장기로 돈을 빌려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이 몇 천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받아도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해서 갚으려면 적어도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몇 억 원의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으면 갚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개인이 아닌 기업이라한들 1년 내외의 단기대출을 받는다면 정상적인 기업활동으로 제때 상환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겠죠. 단기대출을 제때 갚으려면 만기에 다른 단기대출을 받아서 갚는, 대환(리파이낸싱, Re-financing)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즉 당시 한국 기업들이 단기 외채를 빌려 쓸 수 있었던 건 언제든 대출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규 대출이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죠. 그렇다면 기존 대출을 상환할 수 있는 방법은 대출받은 자금으로 투자했던 사업을 매각해 원금을 회수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업에 투자한 자금은 적금을 해약하듯 손쉽게, 온전하게 회수하기 어렵습니다. 빠르게 회수하려 할수록 할인폭은 점점 커지고 결국 헐값 매각과 원금 손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요.
영화 <황해>를 보면 택시운전사 구남(배우: 하정우)에게 사채 빚을 받으러 다니는 건달들이 나옵니다. 구남이 택시 운행을 끝내면 건달들이 찾아와 그날의 수입을 모두 가져갑니다. IMF 역시 한국에 600억 달러를 빌려주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겠죠. 실질적인 채무자인 한국 기업들이 허투루 돈을 쓰지 못하도록 여러 조건을 걸었습니다. 한국도 어느 정도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기업들은 직원을 해고하거나 부실 사업을 정리해야 했고, 은행 역시 이자율을 20% 가까이 높여 대출은 언감생심 반강제로 저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한국 기업의 사업만이 아닙니다. 한국 개인이 보유한 부동산도 마찬가지였겠죠. 한국 기업들이 단기대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한국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만기 역시 지금보다 짧은 5~10년 내외였습니다. 정상적인 소득으로는 만기에 원금을 상환하기는 어려운 기간이죠. 더구나 IMF 구제금융 이후로 소득은 줄어들고 이자만 늘어난다면 주택담보대출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기업이 직원을 해고하고 사업을 매각했던 것처럼, 개인도 부동산을 매각해 대출원금을 회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급매물과 경매가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현금을 가진 누군가는 그 부동산을 싸게 살 수 있었겠죠.
한국은 IMF에서 빌린 돈으로 단기부채를 우선 상환한 뒤, 약 4년 뒤인 2001년 IMF에서 빌린 돈까지 상환했습니다. 마치 한낮에 꿈을 꾼 것처럼, 빚으로 지은 집, 빚으로 채용한 직원, 빚으로 일군 회사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국가부도의 날>
최국희 감독, 2018
1997년, 모두가 한국의 경제 호황을 믿고 있을 때, 국가부도를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비공개 대책팀을 꾸린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작은 공장의 사장인 갑수(허준호)는 대형 백화점과의 어음 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소박한 행복을 꿈꾼다.
한편, 경제위기를 예측한 펀드매니저 윤정학(유아인)은 국가부도의 위기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결심하고 투자자를 모은다.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한시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IMF 총재(뱅상 카셀)가 협상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는데…
"대출이란 건, 말도 안 되는 믿음에 의한 거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