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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범 Oct 03. 2021

가격이 상품인 회사(1)

어느 감정평가사의 변명

탁상행정, 탁상공론, 탁상감정?

'탁상'이라는 단어의 용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탁상의 사전적 의미는 그냥 '책상 종류의 통칭'이라고 한다. 감정평가에도 '탁상감정'이라는 있는데, 정식감정, 그러니까 정식 감정평가와 달리 현장조사나 구체적인 분석 없이 가격자료만으로 대략적인 감정평가액 수준을 추정한다. 대부분의 의뢰인이 정식 감정평가를 의뢰하기 전에 탁상감정을 요청하고 있으니, 탁상감정이 일종의 '견적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감정평가 견적서 양식


감정평가 견적서는 무엇이 다른가

견적서(estimate sheet)에서 필수적인 두 가지 정보는 무엇을 제공하고, 얼마를 받느냐이다. 공급하는 재화나나 서비스의 종류와 수량, 그리고 대가를 적는다. 재화인 경우에는 [책 X 10권 = 100만원]이 되고, 서비스인 경우에는 [청소 X 10시간 =100만원]과 같은 식이다. 감정평가 서비스처럼 투입시간과 무관하게 결과물(감정평가서)제출로 측정되는 서비스는 [감정평가 X 1식 = 100만원]으로 기재하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감정평가 수수료가 감정평가액에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개보수가 [매매금액 X 요율]인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평가 수수료 역시 [감정평가액 X 요율]로 결정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중개보수는 0.9%라는 상한요율만 정해놓고 그 이하에서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되어 있지만, 감정평가 수수료는 0.09%라는 법정 요율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소득세율처럼 금액 구간에 따라 요율이 달라지는 것도 차이점인데, 고액 구간일수록 할증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할인이 된다. 감정평가액이 1조원을 초과하는 구간에서는 최저 요율인 0.01%가 적용된다.


의뢰인에게 정확한 수수료를 안내하려면 감정평가액 수준을 미리 검토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보니, 정식 업무의 준비 절차부터 힘을 빼기 일쑤다. 평가사들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적게는 하루 수 건에서 수십 건까지 탁상감정을 하고 있으니, 어떤 날은 '탁감만 하다가 하루 다 갔다'는 식이다. 그리고 모든 견적서가 그렇듯이, 견적서만 받고 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옆머리만 다듬어 주세요. 마음에 들면 커트 할께요.

유형상품인 재화와 달리 무형상품인 서비스는 미리 사용해 볼 수가 없다. 휴대폰, 자동차 같은 유형상품은 사용기간이 길고 대량생산이 가능하지만,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서비스는 그 시간, 그 공간에 한 번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양을 축소시켜 샘플을 만들 수도 없고, 이용시간을 축소시켜 잠깐 사용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용 서비스를 옆머리만 다듬어 본 후 마음에 들면 커트를 받는다던지, 세탁 서비스를 소매의 얼룩만 지워보고 만족스러울 때 옷을 맡길 수는 없는 것처럼.


상품에 대한 정보가 완전하지 않을 때, 소비자들은 역선택의 가능성에 놓인다. 하지만, 서비스 상품은 실제 이용해보는 것 말고는 품질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용후기에 의존하는 것이 최선이다. 전문 서비스는 이용후기조차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최악의 상품이다. 미용, 세탁서비스와 달리, 전문 서비스는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이런 서비스를 이용할 일도 그리 많지 않다. 의사는 아플 때 만나고, 변호사는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만 만나니까. 막상 서비스를 받는다고 해도 의뢰인의 사정에 따라 서비스 내용이 모두 다르다. 같은 서비스를 경험한 여러 명의 이용후기가 쌓여야 정보가 되는데, 전문 서비스는 그렇지 않다. 서비스의 내용이나 품질에 대한 평가보다는 서비스 제공자의 태도에 대한 인상평 정도만 남는다.


역선택 시장에서 소비자만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공급자 역시 소비자에 대한 정보 부족에 시달린다. 의뢰인에 따라 달라지는 서비스를 불특정다수에게 홍보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나마 과거에 했던 경력을 알리는 것이 최선인데, 민감할 수 있는 의뢰인의 정보를 빼고 나면 쓸만한 내용이 없다.


전문서비스 매칭 플랫폼


가격이 상품인 회사

감정평가법인은 감정평가액이 상품인 회사다. 의뢰내용을 확정하고, 현장을 조사하고, 가격자료를 수집해 분석하고, 감정평가서를 작성하고 심의를 받는,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한 달이 넘어가기도 하는 업무의 최종결과가 감정평가액이지만, 감정평가액을 빼고 견적서를 작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본 탁상감정 결과는 실거래가격 및 평가선례에 기초한 개략적 금액으로서, 현장조사 시 감정평가액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라고 써보지만, 수수료와 연동되어 있는 감정평가액의 변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뢰인은 많지 않다. 최대한 정확하게 예상 감정평가액을 산정하기 위해서, 탁상감정 시간은 더 길어질 수 밖에 없다.


핵심적인 정보가 명시된 견적서에는 남용의 소지가 있다. 일반기업의 기안문이나 대출 주관사의 투자제안서 같은  수준이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의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다. 2012년 한 시중은행이 무료로 제공받은 탁상감정 결과로 담보대출을 실행하자, 한국감정평가사협회에서 예상 감정평가액이 명시된 문서 형식의 탁상자문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감정평가사들은 아직도 전화나 음성메세지를 사용해 "9억에서 11억 정도 될 것 같다."는 식의 안내만 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참고문헌

1. 「공인중개사법」 제32조(중개보수), 동법 시행규칙 제20조(중개보수 및 실비의 한도)

2.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 제23조(수수료 등)

3. 「감정평가업자의 보수에 관한 기준」 제4조(감정평가수수료)

4. "감평사의 문서탁상자문 금지는 적법, 공정위 결정 뒤집은 율촌의 한수" (조선비즈,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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