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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범 Oct 17. 2021

감정평가는 어떻게 비용이 되었나

어느 감정평가사의 변명

금융회사와 금융기관

'기관'이라는 단어는 보통 공공조직에 붙인다. 사기업은 '제조회사, 판매회사'라고 하지, '제조기관, 판매기관'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은행 만큼은, 분명히 사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이라는 지칭이 어색하지 않다. 기업활동의 영향이 그 기업과 고객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호텔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호텔산업에서 끝나지만, 금융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금융산업에서 끝나지 않는다. 금융이 모든 산업의 인프라인 만큼, 순식간에 경제 전체의 위기가 되어버렸다. 1997년 경제위기의 시작에 고려종합금융이 있었고, 2008년 경제위기의 시작에 리먼브러더스가 있었던 것 처럼.


1997년 종합금융회사의 부도 @인터비즈


부실대출을 막기 위한 두 가지 통제장치

은행에 예치한 예금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지난 달에 산 휴대폰이 고장나는 문제와 차원이 다르다. 이런 산업을 사기업에 믿고 맡겨둘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대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간이 하되, 정부가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타협점이다. 그것이 1997년 제정된 「금융감독기구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고, 금융감독원이 하는 일이다. 은행의 대출은 다른 고객이 예치한 예금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원금에 대한 보호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서 부실대출을 예방하기 위한 두 가지 외부 장치가 활용되는데, 채무자의 상환능력이 충분한지 판단하는 신용평가, 채무자가 상환에 실패할 경우 담보물의 처분가치를 판단하는 감정평가이다. 


금융감독원의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은 주택 담보대출의 기준이 되는 주택의 가치에 대해서는 '외부의' 공신력있는 평가결과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아파트는 ①국세청의 기준시가 ②감정평가사의 감정평가액 ③KB국민은행의 부동산시세 중 하나를 사용하도록 했고, 아파트 외의 주택인 단독주택, 다세대주택은 3가지 방법을 참고하여 자체적으로 기준을 정하도록 했다. 마치 상장기업이 재무제표를 공시하기 전에 외부 공인회계사에 의해 감사를 받는 것과 같이, 외부적 통제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2011년, 그때 그 사건

이런 통제장치는 2011년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국은행연합회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소송전이 있었는데, 쟁점은 담보대출을 받을 때 부대비용을 고객과 은행 중 누가 부담하느냐였다. 서울고등법원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제껏 모든 부대비용을 부담했던 고객은 이제 국민주택채권과 인지세만 부담하게 되었다. 감정평가 수수료를 비롯한 나머지 부대비용은 모두 은행의 부담이 되었다. 은행이라는 거대 고객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감정평가는 외부통제보다는 고객만족을 추구하는 서비스가 되었고, 동시에 은행의 비용이 되었다. 


2018년 담보평가 시장현황 @이데일리


그해 이후 은행은 다각도로 감정평가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감정평가 수수료는 세율처럼 수수료율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 줄일 수 없으니, 감정평가 의뢰를 최소화 하는 것이 최선이다. 감정평가사를 고용해 자체적으로 부동산 가치를 평가하기도 했고, 감정평가보다 저렴한 다른 서비스를 찾기 시작했다. 비용은 줄이고 수익은 늘려야 하는 기업으로서, 당연한 노력이었다. 아파트는 KB부동산시세가 그 역할을 맡았고, 이제 연립, 다세대, 단독주택이 남아 있다.


전국의 연립, 다세대주택은 170만 호 정도로 820만 호 수준인 아파트의 20% 수준인데, 건축법상 5층 미만으로 제한되어 있어 사실상 다품종 소량생산에 가깝다. 같은 단지 내에서 면적과 구조가 동일한 비교사례를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아파트와 달리, 비교사례를 찾는 것부터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일이다. 연립, 다세대주택의 중위가격인 1.4억 원 기준으로 감정평가 수수료는 30만 원 정도인데, 여기에 연간 거래량 21만 호를 곱하면 시장 규모는 630억 정도로 추산된다. 이미 건당 30만 수준인 서비스 비용을 낮추려면 인건비, 사람을 노동을 배제하는 방법 밖에 없으니, 추정시세를 제공하는 프롭테크 기업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연립, 다세대주택의 추정시세를 제공하는 프롭테크 기업들


정답이 없는 사람의 일

현행 법령상 은행이 모든 담보물을 감정평가 해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담보대출에서 감정평가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은행이 아닌, 금융감독원에서 판단해야 할 정책적 판단이다. 정책적 판단은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무분별한 주택담보대출로 금융위기를 겪은 미국은 2010년 금융개혁법을 제정해 은행의 감정평가 의무를 강화하고, 은행과 감정평가사의 영업적 관계를 단절시켰다. 회계감사 역시, 부실감사와 분식회계 사건이 문제가 되고 나서야 기업과 공인회계사의 영업적 관계를 단절시키는 지정감사제를 확대하는 식이다.


외부통제가 아닌 추정시세라는 통계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고효율과 저비용의 서비스 논리만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감정평가법인도 여러 제약과 책임이 수반되는 감정평가 대신, 추정시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면 될 일이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통계모형을 설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출구조사로 고비용 저효율 선거를 대체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일에서 통계로 의사결정을 대체할 수는 없다. 외부통제가 목적이라면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의 판단을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고효율과 저비용은 절대 목적이 아닌 최선의 수단일 뿐이다. <끝>



※ 참고문헌

1. 공정거래위원회 보도자료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11년 4월)

2. "은행, 부동산 자체감평 확대…부실 감정 우려" (머니투데이, 2011년 10월)

3. "감정평가협회, '은행과의 전쟁' 선포" (뉴스토마토, 2012년 6월)

4. "11월 새 외감법 시행…감사인 직권 지정대상 확대" (서울파이낸스, 2018년 9월)


※ 용어해설

- 프롭테크 : proptech(property-technology), IT 기반 부동산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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