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와 딸

기쁨이 나를 찾아오는 길

임신 막달 이야기

by 사월

기분이 오락가락이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 때문일까,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출렁인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출산 전 휴직에 들어가야 해서, 그동안 내가 맡아온 진료를 대신할 원장님을 구하는 일이 시급했다. 10월부터는 온 신경을 그 일에만 다 쏟았다. 혼자 해오던 업무들을 문서화해 매뉴얼로 만들고, 구인 공고를 내고, 면접을 보고, 인수인계를 하고...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아직도 많은 일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해도 해도 줄어들지 않는 to do list를 보고 있으면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11월 중순, 출산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아직 아기 물품이 하나도 없다. 여기저기에서 "이건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건 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고마운 조언들이 쏟아졌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다시 마주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오가던 말들이 모여, 어느새 꽤 큰 부담과 압박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은 괜히 서러웠다. 분명 나는 숨이 턱끝까지 찰 정도로 최선을 다해 왔는데... 다른 산모들은 이미 몇 주, 아니 몇 개월 전부터 준비도 차곡차곡하시는 것 같고, 아기방도 꾸미며 아기와 만날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준비한 게 하나도 없을까. 시간의 한계도, 체력의 한계도 너무 원망스러웠다. 벌써 이렇게나 버거운데 내가 과연 엄마 역할을 '보통만큼'이라도 해낼 수 있을까 끊임없는 의심이 든다.


아마 계절 탓도 있었으리라. 난 원래 이 맘 때쯤을 나는 걸 유독 힘겨워했으니까. 산더미같이 쌓인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 날은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든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도, 자꾸만 내 앞에서 바뀌는 빨간 신호등도, 가을과 겨울이 묘하게 섞인 찬 바람도. 발걸음이 무거운 출근길, 한의원에 곧바로 들어가기 싫어 괜스레 편의점에 들렀다.


"배 속에 아기가 있네요."


계산해 주시던 점원분이 정감 있는 경상도 억양으로 인사를 건네주셨다. 때론 정말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 말이 왜 그리 내 마음을 사르르 녹였을까. 그래 내 뱃속엔 아기가 있었지. 우리 예쁜 기쁨이가 있었지. 내가 이렇게 바빠서 신경을 하나도 쓰지 못하는데도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기 몫의 최선을 다하며 자라나는 아가가 있었지. 그날은 그 말 한마디의 힘에 의지해 살아냈다.


만삭의 몸으로 일하는게 힘들기는 하지만 사실 난 아가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좋다. 평생을 살면서 다른 누군가와 24시간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먹을 것도 나눠 먹고, 음악도 같이 듣고, 생각도 감정도 모든 걸 나누며 살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지금뿐일 테니까. 그래서 "배 속에 아기가 있네요." 라는 말이 그토록 좋았나 보다. 나를 알아봐 준 말, 우리 아기를 함께 봐준 말이라서.


얼마전 우연히 '기쁨은 길치'라는 표현을 봤다. 고통은 알아서 잘도 찾아오지만 기쁨은 길치라서 자꾸만 길을 헤맨다고. 좋았던 순간, 기뻤던 이야기, 행복했던 순간을 자주 떠올리며 기쁨이 나에게 잘 찾아올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겠다. 더 이상 슬픔이 길을 막지 않도록. 내 뱃속에는 곧 세상에 나올, 작고 예쁜 아기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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