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심어놓은 작은 씨앗
중학생 무렵 엄마와 함께 주민 센터에서 하는 요가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 씩, 얼마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처음 갔던 날 아주머니들께서 “어머 이쁜 딸도 같이 왔나 봐요!” 하는 인사말로 환영해주던 따뜻한 공간이었다. 여느 사춘기 소녀들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왠지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엄마를 끌고 맨 뒷줄에 자리 잡았다. 엄청 뻣뻣했던 나는 낑낑거리며 선생님의 동작을 간신히 따라했고 그 모습이 기특해보였는지,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뻣뻣해도 열심히 하네요.”라며 아주머니들 앞에서 ‘칭찬’을 했다. 물론 사춘기 예민한 소녀에게는 ‘망신’주는 말로 들렸지만 말이다.
그 후로 요가를 잊고 살았다. 요가를 다시 시작한 건 첫 번째 직장에서 도망치듯 퇴사한 직후인 2017년 3월 무렵이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봐야겠다 결심했지만, 운동에 별 특기도 취미도 없었던 나는 그나마 어릴 때 잠시나마 해봤다고 익숙했던 요가를 선택했다. 당시 살던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요가원이 있었고, 따로 장비도 필요치 않고, 편안한 옷만 입고 오면 된다기에 1회 무료 강습을 받아보고 망설임 없이 바로 등록했다. 그렇게 시작한 요가를 무려 5년 동안이나 계속 하게 될 줄은 그 때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5년이나 요가 수련을 했다고 하면 대부분 다리를 시원하게 찢고 머리서기를 가볍게 하는 정도의 소위 ‘쌉고수’ 요기니(요가하는 여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나의 몸은 열다섯 그 시절과 비슷하게 여전히 뻣뻣하다. 적어도 30~40분은 몸을 풀어줘야 관절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하루 이틀 쉬면 다시 원래처럼 돌아온다. 근력 운동은 또 어찌나 귀찮아하는지 숨쉬기로만 단련된 복근은 생명 유지 기능만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어서 머리서기 같은 멋진 동작도 아직은 무리이다.
그러면 ‘그 운동 너무 지루 하겠는걸? 왜 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산스크리트어로 ‘파스치모타나아사나’라는 동작이 있다. 요가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누구나 살면서 한 번 쯤은 다 해본 동작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체력장(요즘도 체력장을 하나? 문득 궁금해진다.) 때, 윗면에 자가 그려진 나무 상자에 양 발바닥을 대고 앉아 상체를 숙여 얼마나 유연한지 체크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자세, 앉아서 양 다리를 쭉 펴고 상체를 그 위로 숙이는 전굴 자세가 ‘파스치모타나아사나’ 이다.
매트 위에 앉자마자 이 자세를 하면 팽팽해진 햄스트링이 “이러다 끊어지는 거 아니야?” 라며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그 날의 요가로 몸 구석구석을 풀어주고 난 뒤 마지막에 다시 해보면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걸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
나의 요가 선생님께서는 항상 마지막 10분 정도는 하고 싶은 동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 주셨는데, 파스치모타나 자세로 가만히 있다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한다. 눈을 떠봐도 내 다리 사이로 까맣게 아무것도 안보이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내가 쉬고 있는 숨소리에 집중하는 일 뿐인데, 마치 아무것도 없는 심해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곧장 이런 생각이 뒤따른다.
‘오늘도 요가원에 오기 전 하루만 가지말까? 고민 했었는데, 결국 와서 끝까지 해냈다니 참 기특하다. 매일 잘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내 몸아,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리고는 눈시울이 붉어지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매트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은 주로 미래와 과거를 끊임없이 오가며, 후회와 걱정을 거듭한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내고자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들은 뒷전이 되기 일쑤이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해내느라 바쁘다. 요가를 할 때만큼은 뻣뻣한 내 몸 덕분에 다른 생각 하는 것은 사치가 된다. 그래서 ‘지금’만 생각할 수 있다.
지금, 나, 내 몸의 느낌, 그리고 숨.
요가는 이 네 가지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에게 깊은 위로를 건넨다. 그 동안 애쓰느라 수고 많았다고, 지금도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 괜찮다고. 그래서 나는 요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즘도 모녀가 함께 요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렸을 때 엄마랑 다니던 주민 센터가 떠오른다. 그때는 엄마와 함께 운동하는 그 시간이 귀한 줄도 몰랐고 귀찮기만 했다. 귀찮아하는 날 잘 타일러서 데리고 다녀준 엄마에게 새삼 고맙다. 함께 했던 추억을 남겨줘서, 혼자서도 운동할 수 있게 작은 씨앗을 심어줘서. 덕분에 나는 요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요기니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