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맥주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혼자 마시는 '맥주의 맛'을 알게 된, 조금 느린 어른.

by 사월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좋은 일이 있어 기념하기 위해 마시고, 괴로운 일을 털어버리기 위해 마시고,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마신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술을 마신다. 사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맛있지도 않은 술을 사람들은 왜 찾아서 마시는 걸까, 의아한 마음을 가지곤 했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나름 술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TV 프로그램 속에서, 광고 속에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들을 보며 혼자 이렇게 생각하곤 했으니까. 저건 왠지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술의 맛이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슬픔을 잊기 위해, 자축하는 의미로 혼자 방안에서 맥주 한 캔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 그때의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저렇게 술을 즐기는 사람이,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되고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술을 밀어내기 급급했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갖게 된 술자리가 그렇게 유쾌하지 않아서 였을까.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술의 맛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였을까.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갖게 된 술자리에선 언제나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 선언을 하며 다녔었다. 그때 술을 거부했던 이유는 아마 친구들의 모습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막 성인이 된 친구들은 앞다투어 내가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많이 마셔보니 어떤 술이 더 맛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이런 일까지 있었다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모습들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어서. 왜 술을 마시는 것을 과시하는 걸까. 어른이라면 이 정도의 술은 마셔줘야 한다는 걸까. 나이에 취해, 술의 재미에 취해 술을 마시는 친구들을 보며 술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과시하며 마시는, 경쟁하듯 마시는 모습을 먼저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러한 생각을 변화시킨 계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무덥던 여름, 이제 막 취업을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을 때였다. 밥을 먹다 가볍게 술 한잔 하자며 맥주 한 병을 시켜 조금씩 나눠 마시고 있었다. 취직한 곳은 어떤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중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요즘 혼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고. 주중에는 출근 때문에 술을 맘 편하게 마시지 못하다 보니, 금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집 가는 길에 꼭 맥주를 사서 집에 들어간다고 말이다. 혼자서 별 대단하지 않은 안주 하나를 놓고 조용히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게 요즘 자신의 낙,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친구는 나처럼 술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친구는 아니었기에 주중에 쌓였던 피로를 참 소박하게 푸는구나. 참 네 성격처럼 조용히 피로를 푸는구나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며 상상한 친구의 술 마시는 모습은 내가 학창 시절에 TV 속에서 봤던 맥주를 마시는 어른의 모습 같아 보였다.



내가 술을 즐기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맛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다. 솔직히 술은 맛이 없다. 탄산처럼 달지도 않고 주스처럼 마셔도 몸에 죄책감이 덜 하지도 않으니까. 사실 고백하자면, 나도 어른인 척 하고 싶은 마음에 맥주를 산 적이 있다. 하루 종일 피곤에 시달렸던 날, 항상 찾던 탄산음료 대신 맥주를 사서 마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맥주는 맛이 없었다. 여전히 나에겐 썼다. 그렇게 어른인 척하려던, 어른처럼 보이려던 내 작전은 언제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곤 했었다.


사람들은 흔히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술이 땡긴다는 말을 한다. 나는 여태까지 술이 땡긴다는 말보다 탄산음료가 땡긴다, 당이 땡긴다는 말을 더 많이 하고 다녔다. 그만큼 나는 속상하거나 힘이 들 때 탄산음료나 초콜릿을 집어 먹곤 했다. 쓴 알코올의 맛이 아니라 달콤한 맛으로 그 일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하지만 요즘엔 정말 술이 땡긴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곤 한다. 그런 말을 뱉은 내가 조금 신기할 정도로.


내가 처음으로 맥주가 맛있다, 라고 느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보자면,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속상한 감정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을 때였다. 혼자 방 안에서 내가 저질러놓은 것들을 보고 있을 때 문득,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사놓고 냉장고에 방치해두었던 가장 작은 용량의 캔 맥주와 먹다 남은 기름진 과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방으로 들어가 혼자 맥주를 마셨다. 아주 시원한 상태에서 물 마시듯 마셨던, 처음으로 맛있다고 느꼈던 나의 첫 맥주. 흔히들 맥주는 목 넘김이라고 하던데 그 날 마셨던 그 맥주에서 나 역시 처음으로 느꼈다, 그 목 넘김을. 그리고 맥주가 정말 시원하고 맛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진정 맥주의 맛을 알게 되었으니 나는 어른이 된 것일까, 혼자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본다. 맥주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 어른이라고 말하기엔 나는 여전히 부족한 게 많고 더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 맥주의 맛을 이렇게 늦게라도 조금 알게 되었으니 바보처럼 눈물로 감정을 표현하지도, 두려운 마음을 표정으로 들키지도 않는, 조금은 의연하고 내색하지 않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루의 피로를,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를, 너에게 느꼈던 그 소외감을 맥주 한 캔으로 다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월 인스타그램








<나는 막연함에 속았다> 출간 기념 연재

매주 화요일, 책에 담겨 있는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제 1화 <관계를 망치고 있던 건 바로, 나였다>

제 2화 <누군가의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

제 3화 <맥주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도서 정보












예스 24

교보문고

인터파크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도서11번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