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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은 순간이 있다

피클병 같은 존재의 필요성.

by 사월

위안을 받고 싶을 때마다 찾게 되는 드라마가 있다. 2006년에 방영된'연애시대'라는 드라마이다. 방영된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드라마는 변함없이 나에게 어떠한 울림을 전해주 곤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매회 드라마 안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대사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채 삶의 순간순간마다 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렇게 떠오른 대사들은, 표정들은, 음악들은 한없이 나를 다독여주었다. 고요함을 느끼고 싶을 때, 일상의 편안함을 느끼고 싶을 때, 누군가와 멀어지는 이별의 순간에서 위안을 받고 싶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마냥 울고 싶은 지금 이 순간, 나는 드라마의 OST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다.





한동안 독특한 취미를 가진 적이 있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소리만을 듣는 것이다. 드라마 속 소리만을 들으며 그 장면을, 그 감정을 상상해보는 것. 한동안 나는 거리를 다닐 때면 아이팟에 담아놓은 '연애시대'를 틀어놓고 이어폰으로 소리만을 듣곤 했다. 사실 이러한 취미가 생긴 건 아주 우연이었다.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 우연히 소리만을 듣게 되었는데, 영상과 함께 봤을 때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듣게 되어 자연스럽게 취미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 드라마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대사 소리, 배경 소리, 음악 소리가 산책하는 동안 인물이 지었던 표정을, 했던 행동을, 느꼈을 법한 감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위에 드라마의 소리가 입혀지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렇게'연애시대'는 한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 느끼고 싶을 때면 습관처럼 찾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은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최대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마치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표현해봤자 고통스러운 건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게 담담하려고 애쓰던 은호도 무너져 내렸던 순간이 있었다. 꽉 잠겨있는 피클병을 따는, 그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을, 마음을,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지내던 은호는 어느 날,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은 피클병을 가지고 혼자 끙끙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처음엔 가볍게 열리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은호의 혼잣말은 이내 모든 원망의 말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다 가져갔으면서.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으면서. 피클병까지 내 맘대로 열지 못하게 만드는 거냐고. 그렇게 원망 섞은 혼잣말을 이어가던 은호는 끝내 벅차오르는 감정과 함께 피클병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동생을 끌어안으며 엉엉 소리를 내며 눈물을 쏟아내버리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을 수십 번도 넘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매번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통곡하듯 엉엉 울기도, 그냥 또르르 나도 모르게 울기도,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인 채 울기도 하면서. 그렇게 언제나 이 장면에, 은호의 감정에 동화되곤 했다. 오늘, 이 장면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나에겐 피클병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 같다고. 피클병 같은 존재에게 나의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싶은 것 같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것에 불안함을 느끼게 될까. 아무래도 가장 큰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질문이 한없이 늘어나게 되는 그러한 순간 말이다. 그러한 순간들과 마주하게 될 때면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이 선택 한 번이 앞으로의 내 미래를 좌지우지할 테니까. 그렇기에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확고히 할 때까지 주춤하게 되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사람을 선택한 것이, 수없이 내린 결론들이 과연 잘한 선택인 걸까, 문득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막연함에 떨고 있을 때, 삶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뒤흔드는 말을 수도 없이 쏟아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몸 곳곳에 박혀버린 그 말들은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게 만들어 버린다. 그저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게 만든다. 이렇게 엉엉 울어버리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두 손 두발 다 들고 포기 선언을 외치면 이제 나를 그만 흔들지 않을까,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안다. 아무리 어린아이처럼 운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어렸을 때처럼 우는 모습을 누군가가 바라봐주지도, 이해해주지도 않는다는 걸.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온몸을 파르르 떨며 사정없이 운다 해도, 황급히 달려와 눈물을 닦아주는 일 따위는 이제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리고 말았다. 되려 나를 나약한 사람이라 칭하기 바쁘다는 걸. 너는 별 것도 아닌 일에 눈물부터 흘리냐고. 그렇게 나약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내 의지를 비난하기 바쁘다는 걸.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서일까. 모든 것이 막연해지는 순간이 다가올 때면 나는 말없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고요함을 찾아 나섰던 것 같다. 기어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호흡으로 다잡으면서. 이 나이에, 이 시기에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저 맥없이 울어버리는 건 나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담담하게 대사를 내뱉고 있는 은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은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 하여도 우리는 그저 그것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그저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들이 다시 잔잔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진심을 다해 이 순간을, 앞으로의 시간을 돌파해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진심을 다해 버텨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순간 역시 과거의 순간들처럼 기억이 될 테니까. 그리고 먼 훗날엔 추억이라고 부르게 될 날 또한 찾아 올 테니까. 그러니 이미 주저앉아버렸다 하여도, 비록 회복이 더딜지라도 다시 훌훌 털어내고 일어나길 바란다고. 그 담담한 목소리에 담겨 있는 진심을, 나는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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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연함에 속았다> 출간 기념 연재

매주 화요일, 책에 담겨 있는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제 1화 <관계를 망치고 있던 건 바로, 나였다>

제 2화 <누군가의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

제 3화 <맥주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제 4화 <꿈을 포기할 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제 5화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은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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