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의 꿈은 무엇인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래서 어떤 학교의 어떤 학과를 지원해야 할지. 그전까지는 무사안일, 무사태평하게 공부만 잘하면 뭐든 하면서 먹고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아빠는 항상 여자 직업으로 선생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고, 진정으로 우리 형제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 독립하길 원했다. 그것도 빨리. 아빠는 자녀의 결혼을 끝으로 모든 짐을 내려놓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은퇴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항상 서서 수업을 하는 탓에 붉게 열나는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식사 후엔 바로 누워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했다. 성숙한 아이였다면 외벌이 직장인의 고충을 느꼈을까? 당시 나에게 아빠의 다리를 주무르는 일은, 낮에 친구랑 했던 소꿉놀이에서 모래와 강이지풀로 주물럭주물럭 밥을 짓는 것처럼 재미난 놀이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가서 라디오 디스크자키가 되겠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아빠의 기원대로 사범대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임용제도에 커다란 변화를 두고 학내데모가 있었지만, 아빠도 나도 의무발령이라는 오랜 시간 존속된 제도가 하루아침에 붕괴될 것이라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꿈꾸던 안정적인 교직 생활은 어느덧 내 꿈이 되어버렸다. 성장하면서 가장 큰 선택의 기로라고 할 수 있는 대학입시에서 부모의 의견을 즐거운 마음으로 수용해 버렸고 그 이후에도 특별한 반항이나 돌발행동 없이 부모가 생각하는 반경 안에서 행동하며 살아갔다. 말 잘 듣고 온순하고 성실했던 아이는 그대로 그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제시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의심 없이 따라간 것은 극도로 안정감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 본격적으로 진지한 독서를 하면서 사회현상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수용이 가능한 생각과 가치가 생겼다. 모든 것을 이래도 저래도 괜찮은 중간자에서 확고한 취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간혹 대화를 나누면서 숨이 막혀올 정도로 화가 치미는 상대를 만날 때면 다른 의견을 경청해 내는 힘을 얻기도 했지만, 자신을 관조하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다. 왜 화가 치밀었는지 반추해 보면 나란 인간의 성향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 확고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가끔은 이러한 변화가 취향인지 나이 먹으면서 생긴다는 고집이나 아집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안온한 환경에서 소극적으로 타인의 생각과 주장을 수용했던 사람도, 세상에 많은 불편과 부조리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사람도 모두 오롯이 ‘자신’이었다.
이러한 ’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일에는 ‘비폭력 대화’, ‘필사’ 등의 강좌가 영향을 주었고 나를 알아가면서 타인과 세상을 불편하게 느끼는 자신을 편안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언제가 시간이 더 흘러 다른 가치관과 사고체계를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또 다른 삐사감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