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지붕 B사감 Dec 13. 2023

크리스마스에는,

<크리스마스 캐럴, 찰스 디킨슨>

유통기한이 지난 돈가스소스를 냉장고에서 발견했다. 소스를 다 먹어버릴 요량으로 보통 때보다 돈가스를 더 많이 구웠다. 3~4일 지난 소스를 종지에 담아 아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먹어도 안 죽어.’

기한이 적혀있는 물건을 볼 때마다 이맘때면 뭘 하고 있을지,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상상하곤 한다. 이 소스를 사면서 유통기한 날짜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우연히 가족의 생일이나 피아노를 처음 치기 시작한 날, 결혼기념일 등 특별한 날짜를 발견하면 무생명의 물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기분 좋게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런 날들 중에 하나가 성탄절이다. 유통기한 12월 25일. 이 날짜를 발견하면 미래의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상상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들뜨고 따듯한 기분에 휩싸였던 예전의 그날을 소환하기도 했다.




여섯 가족이 큰 방에 모두 모여 나란히 누웠다. 미닫이 문에서 들어오는 한기를 막으려고 쳐놓은 커튼 사이마다 작은 전등이 색을 바꿔가며 반짝였고, 커튼봉 사이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조촐하게 걸려있었다. 머리맡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 모음곡이 흘러나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고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부모님은 산타의 선물을 기대하게 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도 평소와는 다르게 집안에서 반짝이는 장식과 노랫소리, 특별한 간식만으로도 풍족한 느낌이었다.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장만하고 싶었다. 매장마다 장식된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트리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캐럴로 한창 들뜬 거리의 성탄 분위기는 주문은 거는 것 같았다. 몽환적인 종소리마저 들리기 시작하면, 뭐라도 사서 알록달록 포장지에 싸서 전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졌다. 쇼핑가를 몇 번이고 기웃거리며 진열된 선물을 구경했다. 계절에 맞는 털장갑, 목도리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선물답게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도 다리가 아프도록 싸돌아다니며 보고 또 봤다. 그것만으로도 즐겁고 흥분되었다.


어렵게 겨우 모은 용돈이었지만 살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른 것이 8천 원짜리 라이터.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아빠를 위해 고른 선물은 파란색 라이터였다. 다른 가족의 선물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 도대체 아무 소용이 닿지 않는 그 선물만은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예쁜 쓰레기’라고나 해야 할까?! 선물을 받은 아빠의 반응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뜨악했던 분위기를 기억에서 지운 탓일지도. 어릴 적 성탄 즈음에는 그렇게 잔잔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들떠 있었다.


언제부터 성탄절을 즐겼는지,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는 성경학교에서 주는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에 끌려서, 중고등학교 때에는 교회 밴드오빠를 보기 위해서 꽤 긴 세월 동안 교회를 들락날락거렸다. 당연히 교회의 큰 행사인 성탄 올나잇에도 참석했고 무려 성가대에서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목사님은 성가대의 노래가 끝나면 낮은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는 이유가 되는 마냥 무척 즐겼다. 그러나 40여 분을 지치지 않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외치며 기도를 하고도 이어졌던 목사님의 설교에 감복되는 기적은 없았다. 믿음이 깊어지기는커녕 성인이 되면서 더 이상 교회에 재미 삼아 가는 일도 없어졌다.


성탄절의 의미 따위를 생각하며 그날을 즐긴 기억은 없지만 교회에서 완전히 멀어지면서 이상하게도 그날의 흥분과 들뜨는 분위기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냉담해졌다. 쇼핑몰의 화려한 장식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지고 가족과 나누는 선물을 마련하는 과정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이제 비흡연자에게 라이터를 선물할 정도로 자기만족에만 몰입한 어린이도 아니니, 생각이 많아지다가 지치고 귀찮아졌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준 성탄 선물은 거북이 장난감이다. (그래서 아이가 느릿느릿한가! 역시 태교는 중요한가 보다.) 아기거북과 엄마거북은 줄로 이어져있고 뒤에 달린 아기거북을 당기면 엄마거북이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나간다. 때가 묻고 색이 바랜 거북이는 아직 창고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태어날 그날을 기다리며 선물을 준비했을 때 삐사감은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빠의 라이터를 사면서 거금을 치를 때에도, 여섯 식구가 한방에 누워 캐럴을 들으며 잠들 때에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에는, 그 정도라도 괜찮겠다. 평소보다는 조금 나사 풀린 사람처럼 무모하게,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오는 따듯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꼭 부여잡고 사소한 마음이라도 전하는 용기로 충만하기를. 적게 생각하고 지치지 말고!!


"삼촌, 세상에는 돈벌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기쁜 일이 많아요. 크리스마스도 그런 일 중에 하나죠. (…) 제가 알기론 크리스마스가 일 년 열두 달 중에 남녀노소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굳게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목적지가 다른 별종이 아니라 저승까지 함께 갈 동지로 여기는 유일한 때란 말이죠. 그러니까 삼촌, 크리스마스에 밥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즐거운 날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을 겁니다. 그래서 전 이렇게 말하죠, 크리스마스에 축복이 내리길!"

<찰스 디킨슨, 초판본 크리스마스 캐럴, p.17>





















매거진의 이전글 마냥 게으르고 평온한 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