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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l 04. 2024

마시다_중국차

얼죽아 전에 더죽차




이 도시에도 나름의 겨울이 찾아온다. 12월에서 2월까지는 더운 기운이 가시고 보송보송한 상태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즈음이면 집 밖보다 집안이 훨씬 춥게 느껴진다. 전기료 걱정에 집안을 온열기로 마냥 데울 수는 없으니, 오랜만에 두꺼운 옷과 양말, 슬리퍼를 신고 찻주전자를 티워머에 올려놓는다. 바람에 따라 촛불이 여러 색으로 일렁이는 모습만으로도 집안이 따듯하게 느껴진다. 어디선가 굴러들어 온 찻잎은 짧은 겨울 동안 먹어두지 않으면 또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서늘한 공기가 닿는 느낌, 얼마나 오랜만인지. 찬 음료가 아닌 따듯한 음료를 찾게 되는 짧아서 더 소중한 계절이다.  


현지인은 어그부츠에 털을 빵빵하게 채운 패딩까지 몸에 두르고 목도리, 장갑도 잊지 않는다. 어느 해인가 유례없이 최저 기온이 10도 언저리까지 떨어진 때에는 사망사고가 날 정도로 이 지역 주택의 난방은 취약한 편이다. 한국과 같이 두세 겹으로 찬 기운을 막아주는 새시는 고사하고 온돌은 눈을 씻어도 찾기 힘들었다. 간혹 한국인의 집에는 동판에 열선을 깔아 온돌을 대신하기도 했다.


새시가 이 모양이다 보니 더운 여름에 열심히 냉방기를 돌려도 숭숭 뚫린 틈 사이로 냉기는 빠져나가고 온열기로 겨우 냉기를 잡아놓아도 허술하게 마감된 창문틀 사이로 차가운 기운은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서 만족스럽게 냉난방하지 못하면서도 일년내내 전기료를 신경 쓰며 지내야 했다. 어쩌면 한국의 사계가, 그중에서 여름과 겨울의 더위와 추위가 에너지 효율에 그토록 열중하게 했다면 이곳은 사계절이 너무나 온화(현지인 입장에서)해서 그렇게까지 철저해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북방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한 자국민들은 이곳의 기후를 썩 마음에 들어 했다. 겨울의 맹렬한 추위를 겪을 일이 없고 더위는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어컨이 집안에 없더라도 땔감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한 북쪽의 겨울보다 남방의 더위는 쉽게 견뎌낼 수 있는 듯했다.


겨울의 어느 날인가 싸고 멋들어진 차 도구가 즐비하다는 시장으로 쇼핑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갔다. 우선 장비를 갖추고 나면 저절로 차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저 쇼핑에 미쳐 맨날 뭔가를 사들이던 때이기도 했다. 중국차를 제대로 마셔보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는지, 쇼핑 중독이 이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차 문화를 즐기고 있는 친구가 있는지 자못 궁금하긴 하다. 시장에 들어서자, 찻물의 온도에 따라 두꺼비(거북이?)의 색이 오묘하게 변하는 차 도구(차의 적정한 온도를 맞추기 위한 도구)에 반색했고 멋들어진 차 도구 세트의 가격에 환호했다. 선전은 중국 내에서도 물가가 비싼 도시라고는 하지만 중국이란 나라는 한국보다 모든 것이 아직은 저렴했다.


시장에 가면 커다란 포댓자루 가득히 찻잎이 쌓아 올려 있었다. 다른 공산품들과 달리 찻잎은 싼 것과 비싼 것의 가격 차이가 컸다. 딱딱하게 돌처럼 굳은 보이차는 먹는 방법도 몰랐지만, 손에 닿지 않을 정도의 가격이었고 국화차를 비롯한 꽃차 종류는 그에 비해서 많이 싼 편이었다. 시장 안에 찻잎을 파는 곳이 한 구역을 버젓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중국은 차의 나라였다.


우리도 겨울에는 차를 즐기는 척할 수 있었다. 난방이 잘 안되는 집안의 추위를 위로하는 방편으로 티워머를 켜두고 그 위에 찻주전자를 올려놓고 집안 구석 어딘가에 박혀있던 찻잎을 꺼내서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간은 오래되지 않아 끝나고 다시 씽바크어(星巴克, 스타벅스)로 향했다. 갈증이 찾아오는 계절이 된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훠궈로 배를 든든히 채우면 냉방이 짱짱하게 들어오는 씽바크어에 들러서 아이들이 들이닥치는 이른 오후까지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이어갔다.


화려한 인테리어를 갖춘 스타벅스는 백화점마다 반드시 입점해 있었다. 대표메뉴 아메리카노(美式咖啡)가 21위안(당시 환율로 3.5천 원이어서 한국보다 저렴했지만, 현재는 30위안으로 인상된 데다가 환율도 올라 한국을 역전해 버림)이었다. 커피를 마시면 가슴이 튀어나올 것 같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로 카페인에 민감했던 시절에 스타벅스 커피는 탕약처럼 느껴졌다. 색도 진하거니와 지독하게도 진한 탄 맛이 특징이었다. 누군가는 한국의 것보다 훨씬 탄 맛이 강하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수익 창출에 일가견 있는 중국인들의 장사 마인드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 스타벅스는 탕약 같았던 커피를 희석할 수 있는 뜨거운 물과 컵을 제공해 주었다. 1인 1식과 1인 1 음료가 정착한 지금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그때는 가능했다. 2+2, 두 잔을 주문하고 묽게 해서 네 명이 나눠마시기. 커피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삐사감이나 이제 막 입문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관대한 서비스였다.


계절에 따라 취향이 호로록 바뀌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중국의 차 문화에 정착하지 못하고 막 상륙한 스타벅스나 코스타 커피 등등을 전전했다. 만약 겨울이 길고 혹독한 동북지역에 살았다면 중국의 차 문화를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전의 날씨 속에서 따듯한 차를 마시는 일은 수행을 넘어서 고행처럼 느껴졌다.


물론 젊거나 유행에 민감한 중국인 중에는 커피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중국인의 차 사랑은 여전했다. 많은 중국인의 한쪽 손에는 차를 우려낸 텀블러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더위나 추위를 따지지 않고 찻잎을 우려낸 물을 마셨다. 심지어 야외 골프연습장에서도 연습 중간중간 찻잎을 우려내서 마셨고 가게 안에서도 차 도구를 갖추고 차를 우려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플라스틱 물병은 찻잎 색으로 물들어 투명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여러 번 그것을 사용했는지 역사가 보이는 듯한 텀블러를 들고 그들은 일을 하고 공원에서 밥을 먹었다.


어떤 차를 마실 것인가?


식당에 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선택하는가. 우리가 보통 음식과 함께 마실 것으로 음료나 술을 주문한다면 중국인은 모든 것에 앞서 차를 고를 것이다. 보이차, 철관음, 국화차, 재스민차... 차를 마신 지 얼마 안 되는 우리는 적당히 아무거나 선택해서 마셨다. 찻물로 식기를 대충 헹구고 한 모금 정도 목을 축일뿐 음식이 바로 입안으로 직행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에야 차에 눈길이 머문다. 정신을 맑게 하고 해독작용을 하며, 피로를 없애준다는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기대하지 않지만, 그것을 일상의 습관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찻물은 찬 것만으로 채워지던 속을 다스리고,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중화시켰다. 적당히 식어 온기가 남은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몸에 이로운 뭔가를 넣어주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차는 뱃속을 편안하게 감싸고 돌았다.


얼음을 가득 채운 아이스 음료를 들고 한겨울 엄동설한 추위에 차가움을 더하는 '얼죽아'가 있기 훨씬 전에 추워도 더워도 죽어도 더운 차를 선택하는 '더죽차'가 있었다. '더죽차'가 아직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것이지만 왠지 좀 더 건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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