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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l 21. 2023

조말론과 비둘기

  삐사감은 오늘도 더운 아침을 맞이했다. 햇살이 거실 깊숙이 가득해지기 전에 되도록 집안일을 끝내려고 손이 바빠진다. 우선 식물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면서 화분 속을 손가락으로 찔러 흙상태를 확인한다. 오늘은 대여섯 개 화분만 옮겨 물을 줘도 될 것 같다. 욕실로 옮겨 물을 주는 동시에 샤워부스를 청소하다가 선반 위 비누곽밑에 고인 물을 보고 조금 화가 일어난다. 고형비누, 안 쓰면 안 되나?


  유수풀에 누워있는 것처럼 유튜브 영상 파도에 올라타고 목적 없이 흘러가다가 유명한 강사의 영상에 도착했다. 투자를 독려하는 팟캐스트를 듣다가 자극받아 유튜브에서 몇 가지를 검색한 삐사감을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끈 것이다. 영어강사로 성공한 이 여성은 소위 매운맛 동기부여 영상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초년생의 재테크 방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은 종잣돈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지독하게 아껴서 저축하고, 부단히 노력해서 스펙 쌓기를 강조했다.


  이 영상에서 갑자기 도*고형비누와 조**이 등장했다. 한 구독자가 수입은 늘어나지 않아서 고형비누를 써가며 짠순이생활을 하고 있는데 언젠가 조**같은 것도 써보고 싶다, 어느 정도 안정 혹은 수입이 보장되면 고급 샤워젤을 써도 되는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다른 어떤 욕구보다도 고급 샤워젤을 쓰고 싶은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도*를 사랑하는 사람을 삐사감은 떠올렸다. 조**이 있어도 고형비누를 쓰는 그는 환경을 생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브, 비둘기가 상징하는 평화를 사랑해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나 비둘기비누랑 비둘기샴푸 좀 사주라 “

삐사감의 반려인이 또 비둘기타령을 한다. 매번 고형비누가 떨어지면 액체비누를 샴푸와 린스옆에 나란히 놓아두고 비누곽을 말려 재빨리 화장실 수납장 속에 봉인해 둔다. 하지만 반려인은 며칠이 지나면 비누곽을 집요하게 찾아내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비누받침에 올려놓은 고형비누는 샤워물이 튀면서 조금씩 녹아내리고, 비누곽 밑은 녹아내린 비눗물이 찐득하게 눌어붙어 청소할 때 한 번씩은 꼭 훔쳐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꽤 귀찮은 일이다. 게다가 며칠 잊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면 고인 물은 비누를 더 녹이고 농도 짙은 비눗물이 넘쳐나 쓰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아진다. 더운 여름날, 성질 급한 삐사감은 비누곽을 노려보며 잠시 멈춰 선다. 왜 굳이 고형비누를 쓰겠다고 하는지 불만이었지만, 개인적 취향에 이유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하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급 액체비누 조**이 선물로 굴러들어 왔다. 가성비로 따지면 비둘기를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이 액체비누, 정식명칭은 바디 앤 핸드 워시젤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럭셔리 프리미엄 비누가 생겼으니 이제 고형비누를 퇴출시킬 좋은 구실이 생긴 것이다.


  사실 써보니 조**은 우아하면서도 코를 찌를듯한 인공향이 적어 기분 좋게 샤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워가 끝나는 동시에 마치 12시가 되면 마차는 호박으로, 반쩍이던 화려한 드레스는 누더기옷으로 변하는 것처럼 향기가 사라졌다. 단지 샤워볼에만 세제가 남아 주변에 향기가 맴돌 뿐. 옷감을 비비면 향기캡슐이 터져 오랜 시간 향이 지속되는 -인체에 무해한지 모르겠지만- 섬유유연제처럼 적어도 향이 반나절은 몸에 남거나 피부가 보들보들 아기처럼 되는 마술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었다. 시쳇말로 벤*처럼 승차감보다 하차감이 좋은, 타인에게 자랑할만한 아이템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이 지속되지 않으니 누구도 삐사감이 조**을 쓰는지 알뜰쌀뜰 알**을 쓰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 다소 치명적이었다. 가성비나 보급형에 약한 삐사감에게 이 샤워젤은 너무 사치다. 선물이라면 환영이지만.


  조**을 쓰고 싶다는 취업준비생에게 강사는 살짝 웃으며  “그냥 조**정도는 씁시다. 그 정도는 하고 살아요”. 대신 다른 짠테크는 모두 실천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취준생은 조** 같은 것들을 맘껏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지, 조**만을 소비한다고 만족할 수 없으리라 삐사감은 생각했다.


  비둘기와 조**. 삐사감은 단지 개인적 기호에 의한 선택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승차감 대신 하차감을 고려하거나 비싸서 더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지 않기를. 마치 반려인이 그 어떤 것보다도 비둘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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