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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Nov 13. 2024

체호프의 영지

멜리호보에서의 하루

  모스크바에 머문 열흘 중 하루는 안톤 체호프 영지가 있는 멜리호보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체호프가 여러 해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주민들에게 의술을 베풀기도 했다는 멜리호보로 떠나는 날은 몹시 흐렸다. 


  키루쿠스역에서 1시간 30분가량 달려서 체호프역에 도착했다. 역사를 나서자 누추한 풍경이 펼쳐졌다. 거센 바람에 개찰구로 연결되는 지하도에 쓰레기가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인도를 점령한 쓰레기를 헤치며 역사 밖으로 나오니 날씨조차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멜리호보 영지로 가기 위해서는 25번 버스를 한 차례 더 타야 했다. 멜리호보로 가는 배차 시간이 여유 있어서 체홉 역사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박한 주민들이 가판대에 과일과 채소를 펼쳐놓고 팔고 있는 풍경이 옛날 어린 시절 보았던 외가댁 시골 오일장 분위기였다. 활짝 열어놓은 식당 안에서는 요란한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활기찼고, 각자의 일상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판대에서 싱싱한 방울토마토를 샀다. 우리 돈으로 천 원 정도였는데 그날 우리 부부가 먹기에도 많은 양이어서 다음날까지 먹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25번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탑승하면서 기사님께 하차 목적지를 말씀드리고 빈자리에 착석했다. 30분가량 갔을까? 이제 내릴 때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역에서 하차하라고 알려주셨다. 내린 후에도 손짓으로 체홉의 영지 쪽을 가리키셨다. "쓰바씨바." 할아버지 기사님이 지시한 방향에는 체홉의 영지 표지판이 친절하게 세워져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 덮여있던 체홉의 멜리호보 영지 입구에 서 있노라니 무수히 이 앞을 오갔을 체호프의 발길이 저절로 그려졌다. 영지에 들어섰을 때는 금방이라도 비를 몰고 올 것 같던 먹구름이 아니나 다를까?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었다. 잠시 뒤엔 언제 비가 내렸어하며 얼마나 투명한 하늘빛을 보이던지. 주변에 싱싱하게 자란 사과나무와 소박한 들꽃들이 방문객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방금 떨어진 사과 몇 알을 닦아서 먹는데 그 달콤한 과육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의 행복감이라니, 고개 들어 맑은 하늘과 눈 맞춤했던 순간의 짜릿함으로 기억할 밖에.


  멜리호보를 체호프의 영지라고 하지만 톨스토이 영지인 야스나야 뽈라냐를 이미 방문해 보았기에 영지보다는 체홉의 집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라에서 하사 받은 땅이 아닌 자신이 직접 구입한 땅이니 체홉의 집이라고 하는 게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마냥 아담한 공간도 아니었다. 어쨌든 밟고 있는 땅이 러시아이니까 넓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메인 하우스로 향했다. 입구를 지나자 곧 서재가 나왔고 한쪽에 그랜드 피아노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피아노 위에 놓인 악보를 보면서 자연스레 차이콥스키가 떠올랐다. <예브게니 오네긴> 작품을 좋아한 체호프는 극작가였던 차이콥스키의 동생을 통해 차이콥스키를 알게 됐고 그에게 단편집을 증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차이콥스키의 사진이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를 일깨웠다. 그 외 톨스토이, 푸시킨, 투르게네프의 사진도 있었는데 모두 체호프에게 영향을 준 문인들이었다.


  체호프의 작은방 소박한 침구를 보면서 자연스레 떠오른 침구가 있었다. 야스나야 뽈라냐의 톨스토이 침대와, 페리델키노 다차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침대 역시 작고 소박했다. 세 사람 모두 작지 않은 체구였음에도 자그마한 침구에서 수면을 취했다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저런 좁은 침대에선 뒤치락거리기도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차렷 자세로 잠들었다가 그대로 일어나는 게 창작활동에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어려웠다.


  반면 정돈된 주방과 우아한 다이닝룸, 화단에서 금방 따서 꽂아놓은 듯싶은 창가의 화병 등, 마음이 따뜻해지는 공간이었다. 공들인 흔적이 다분히 느껴져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으니까. 메인 하우스는 체호프가 살던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채 잘 보존되어 있었다.


  메인 하우스에서 30미터 정도 떨어졌을까? 별장처럼 보이는 하늘색 공간은 동화에서나 나올 듯한 풍경이었다. 멜리호보 시기에 쓴 희곡 『갈매기』의 집필실이란 팻말 앞에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산책하는 안톤 체호프의 모습을 얼추 만난 것도 같았다. 바로 저 집필실에서 탄생한 작품이 갈매기라니, 집필실 앞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작품 속 인물들을 회상해 보았다. 니나와 이리나, 그리고 콘스탄틴과 보리스까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분명한 캐릭터들이 영지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극 중 대사를 생동감 있게 외치면서 넓은 영지를 활개 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으니까. 


  착각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주말에는 영지에 마련된 공연장에서 체호프의 작품을 올리고 있었다. 체호프의 집 사이트를 방문해 보니 야외 공연 소식이 있었다. 야외 공연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특히 갈매기를 야외에서 공연한다면? 2018년 개봉했던 영화 <갈매기>에서의 야외 공연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영화 촬영을 혹시 멜리호보 영지에서 하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영지를 둘러보다 보면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는 진료실도 둘러볼 수 있었다. 진료실 앞에는 약초들이 가득했고 진료실 내엔 약간의 의료 기구와, 그가 입었던 흰 가운과 마도로스 모자가 걸려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낮에는 진료를 보던 체호프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반려견을 사랑했던 그의 영지답게 큰 개들이 영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녔으며 개 조형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9월 중순 투명한 하늘, 따뜻한 햇볕 아래 벤치에 앉아 준비한 점심을 풀어놓고 짝꿍과 야외 식사를 즐겼다. 맥주 캔을 들고 행복해하던 짝꿍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검고 커다란 개 한 마리가 테이블 벤치 앞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개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즐겼던 식사시간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고스란히 떠올랐다.


  멜리호보 시골집에서 썼다는 바냐아저씨, 작품 속 명대사로 멜리호보 영지에서의 추억을 곱씹을 수 있었다. 바냐아저씨의 독백을 가끔 읊조려보았다.


  "지난 25년 동안 난 이 땅의 관리를 맡아서 피땀 흘려가며 열심히 일을 해 부지런히 당신에게 돈을 부쳤어. (…) 그런데 당신은 그동안 내게 고맙다는 인사해 본 적 있어? (…) 당신은 내 일생을 망치고 말았어. 이 나이가 되기까지 난 생활을 맛본 적이 없어. 참다운 생활을 말이야! 당신 덕택에 난 생애에서 가장 좋은 시기를 쓸모없이 모조리 썩혀 버리고 만 거야! (…) 난 재간도 있고 영리하고 용감한 사내였는데... 어머니, 난 이제 절망이에요!" 


  노동으로 일관했던 바냐, 헌신이 당연했던 바냐의 한평생, 누군가의 화려한 업적은 누군가의 희생적인 노동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거였다. 그런데 그 터 마저 앗아가려는 세라브랴꼬프에게 바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정직한 삶을 살던 이들은 죽음도 정직하게 때를 지키고자 한다는 체호프의 표현. 죽음도 정직하게 때를 지킨다,는 표현에 한참을 멈춰 있었다. 아! 정직하게 때를 지키는 죽음이라니. 정직한 삶을 산 사람들의 죽음이 그렇구나.


  정직한 인생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 그런가 말이다. 정직한 그들의 삶의 엔딩은 대부분 비슷하다. 체호프가 쓴 희곡 엔딩 대부분도 그렇다. 삶은 계속된다고 일깨워 주듯이.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간 바냐에게 소냐는 말한다. "어쩌겠어요. 그래도 살아가야죠"라고. 그 시절의 삶이나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이나 달라진 게 없다. 어쩌겠어요, 그래도 살아가야죠. 우리 모두의 엔딩이지 않은가?


  멜리호보 영지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노동하는 손길과 발길을 만났다. 그들의 모습에서 바냐아저씨를 만났다.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주변 사람들 속에서, 자기 안에서 꾸준히 바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냐는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바냐는 우리 모두의 초상화가 아닐까?


  오늘날까지 체호프의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가 뭘까?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고 공연에 올리는 이유가 무얼까?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속됨과 허위를 싫어하고 무엇보다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 아닐까. 또한 좌절 가운데서도 결국은 묵묵하게 희망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 아닐까? 어쩌겠어요, 그래도 살아가야죠, 라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거죠. 그 행렬에 조용히 가담하여 걸어 나가야겠다.


  떠나고 싶지 않은 영지를 아쉽게 뒤돌아보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정거장으로 향했다. 재미있던 것은 25번 버스 할아버지 기사님의 버스를 다시 탔다는 점이다. 작은 마을이라 한두 대의 버스로 운행하고 있는 듯했다. 멜리호보에 왔던 방법 그대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체호프의 단편이나 희곡을 읽고 있노라면 서서히 내 마음의 상처가, 내 몸 어딘가 벌어져서 쓰라렸던 부분이 아물어가는 기분이 든다. 체호프의 글이 연고가 되어 내 상처를 치료해 주고, 진정제가 되어 내 마음을 다독거린다. 그의 글은 전혀 모르지만 왠지 잘 아는 것 같은 누군가가 툭툭 던지는 말 같다. 그런데 그 말이 힘이 된다. 요란스럽지 않지만 명랑한 힘이 느껴진다. 행복은 불현듯 찾아온다. 아주 무심한 듯 갑자기. 체호프의 글이 그렇다. 살아야겠다는 용기를 주며 어깨를 다독여주니까.


  체호프의 글은 어떤 거창함이 아니라 사소함의 총체인 삶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지금 거기에서부터 일어나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세자매> 마지막 대사가 그렇지 않은가. 

  "살아야 돼, 일을 할 거야. 살고 싶어져, 우리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가는 거야."

  마지막 대사를 읽고 있노라면 폴 발레리의 명문장까지 자연스레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봐야겠다."

  그래 진짜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서자. 거기서부터 끝나지 않은 삶을 다시 시작하자. 살고 싶어 진다. 아직 내 삶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삽을 들고 묵묵히 걷고 있을 바냐아저씨를 어디선가 만날것 같던 영지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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