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놀라운 세 살 아이의 기억이라니...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이야기가 다분히 깔려있으리라 상상하며 그녀의 맹랑 발칙한 눈빛을 떠올렸다. 세 살 아이의 기억이 이토록 선명할 수 있다니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라 미루어 짐작하면서도 놀랍다. 읽으면서 내 딸아이의 세 살 성장과정을 반추했다. 일부분 공감했으나 많은 부분에선 괴이한 흥분을 감추치 못했다. 아무튼 여러 쾌감을 동반한 독서 경험이었다.
2년간 식물이었다가 이후 6개월간 불면(不眠)의 성난 짐승 그 자체여서 창문으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게 했던 ‘나’. 그럼에도 의사들은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장님도 아니라고 판정한다. 드디어 할머니가 쥐여준 화이트초콜릿의 은총으로 두 살 반의 나이로 태어난 ‘나’. 나는 쾌락의 발원지, 쾌락이 있는 곳마다 내가 있고, 내가 없으면 초콜릿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 입속으로 들어갈 때, 그건 쾌락이 된다.
나에게 정체성을 주면서 기억도 같이 준 화이트초콜릿의 쾌락으로 파이프였던 나는 모든 부모가 꿈꾸는 이상적인 아이가 된다. 45쪽을 참조하자면 얌전하면서도 생기 넘치고, 조용하면서도 의욕적이고, 재미있으면서도 생각이 깊고, 정열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이고, 순종적이면서도 자율적인 아이로.
그 아이가 최초로 선택한 언어인 '엄마'에서 '바다'까지 일곱 개 언어를 정리해 본다.
쾌락을 알고 첫 언어로 내뱉은 '엄마', 두 번째 언어는 '아빠', 세 번째로 뱉은 말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바꿔놓는 '진공청소기', 네 번째 말은 불러주기 무섭게 서로에게 불타는 애정을 느끼게 된 언니 '줄리엣', 다섯 번째로 부른 이름은 유모 '니쇼상', 여섯 번째 단어는 할머니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내뱉은 '죽음', 두 살 반이라는 이유로 죽음까지는 한참 남은 것처럼 말하는 엄마, 사실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있고, 기억 속에는 할머니의 존재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았고 내 방으로 가서 멋진 팽이 놀이를 한다. 끝없이 회전하는 팽이를 보고 ‘나’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것은 (아마도 그 순간 순환하는 삶을 느꼈기 때문) 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일곱 번째 단어 '바다'. 공포와 욕망의 액체가 ‘나’를 휩쓸어 표면에 올려놓을 때마다 쾌락으로 소리 지르게 했던 바로 그 바다. 물속에서 ‘나’는 두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역시 두 번의 방관적인 태도를 마주한다.
자제하는 병에 걸린 나의 적, 카시마상. 목숨을 구해주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구해주지 않는다는 일본의 오랜 전통에 충실해서, 죽어가는 나를 구경만 하고 있던 카시마상의 자제력이 놀라웠다. 그럼에도 '나'가 자신의 선택을 존중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던 모습에 더 놀랐다. 죽음은 잠을 자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거라고 했던 니쇼상의 죽음론을 상기하며 그 순간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걸까? 이제 겨우 세 살인 ‘나’. 세 살은 前生의 삶의 피로도가 더 생생하게 느껴져, 그래서 그만 살고 싶어 졌다는 것을 너희들이 감히 알아?라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소나기를 맞이하는 자세와 스스로 최면을 걸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믿는 모습,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기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 취향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혐오감이 '나'를 말해준다고 믿는 '나', 이쯤에서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나의 혐오 대상은 뭘까 생각했다. 취향이 아니라 혐오하는 것이 그 사람을 더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섬찟할 정도로 영악한 '나', 그 '나'가 혹시 내 아이의 세 살 적 모습 일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렇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어설픈 부모로서의 내 모습은 어땠을까? 강한 도리질로 외면하고 싶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덜컥 엄마가 되어버린 나를 그 시절 내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저 표현을 안 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태어나는 시초부터 자기표현을 너무나 확실하게 해왔는지도 모르지. 그저 부모라는 권력의 잣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 건 아닌지. 순수하고 맑은 눈빛을 하고서 어른들의 어설픈 행동을 비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저 여섯 음절만이 나를 뒤흔들 뿐. 인간의 마음은 "아. 무. 도. 모. 른. 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나'의 그토록 아름다운 세 살과 마주한 책 읽기는 유쾌, 통쾌, 명쾌, 상쾌, 동시에 불쾌까지 체험하게 했다. 그 체험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