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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Jun 09. 2023

카트만두, 히말라야의 도시

삶은 여행, 여행은 삶

카트만두(Katmandu)는 칸티푸르(Kantipur)라는 옛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10세기 무렵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라 왕조 때부터로 알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말라 왕조의 뒤를 이은 구르카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네팔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려왔다. 상업과 수공업이 활발하며 시가지에는 행정청, 옛 왕궁, 대학 외에 불교 · 힌두교 사찰이 많다.


인도의 캘커타, 방글라데시의 다카로 통하는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다. 그로 인해 5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해발 1400m의 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카트만두는 무엇보다도 히말라야 관광의 입구로 세계 산악인들의 출입이 잦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저 맑은 눈빛 속에서 그들의 미래도 밝게 타오르며 빛나기를...

하릴없이 오고 가는 많은 사람, 가난에 찌들었어도 사후 세상에서 잘 살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에게 사후가 아니라 지금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는 없는 걸까? 어쩌면 변화를 바라는 내 이 발상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겐 무엇보다 오래도록 간직해 온 소중한 가치이자 삶의 의미일 테니까.


지구상에 미래는 존재하는 것일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 산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보다 불행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고 마주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만나면 가슴속에선 언제나 두 개의 다른 물체가 쿵하고 부딪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눈빛이 초록의 존재 이유와 진정한 행복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은 되묻는다. 너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 너는 행복하냐고.

학교 입구 골목길이 인상적이어서 한 컷!

네팔리의 빨래 말리는 방식이 하도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길을 걷다가 한 컷 찍어둔 사진을 꺼내 보았다. 나도 아침 일찍 이불빨래를 했다. 네팔리처럼 얕은 나무 위에 넌 것이 아니라 베란다 밖에 널었다. 어제 내린 비탓에 오늘의 햇볕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제법 바람까지 불어대니 널어둔 침대시트가 뽀송뽀송 잘 마르겠지. 추억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어떤 연관된 풍경이나, 냄새, 혹은 음악으로 그때 그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불러냈다. 그래서 추억이 많은 사람은 언제나 부자다. 헛헛할 때 마음속 추억을 하나씩 들추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카트만두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구, 라이언. 그는 인도 깔림뽕이란 도시에서 그곳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끝내고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카트만두 여행에 오른 스물넷의 캐나디안이었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그 당시 석사과정에 있던 라이언의 유머는 우리 모녀를 3박 4일간 유쾌하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우리를 만난 후, 곧바로 서점에 들러 한국어 교본을 사들고 은비에게 한국어 배우기를 요청했다. 그는 이미 영어, 불어는 물론 독일어와 중국어 인도어까지 어느 정도 구사할 줄 아는 젊은이였다.


3일간 저녁식사를 계속 함께하며, 건강한 이국 젊은이의 유쾌함에 기분 좋게 빠져들었다. 비흡연자였고 생각하는 자세도 건전하고 진지했으며, 한 마디로 정신이 건강한 젊은이였다. 거기에 생각의 틀도 매우 유연해서, 보고 있기만 해도 저절로 기분 좋아지는 젊은이였다.

사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정말이지 수도 없이 많은 원숭이를 만났다. 은비와 라이언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저 계단을 올랐을까?


스와얌부나트 사원 입구에 늘어선 등잔이 인상적이었다. 사원 입구에 있는 등잔에 소망을 기원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데. 기원하는 순간의 마음이 중요하겠지. 소망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겠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말이다.


네팔리 시인, 두르가 랄 쉬레스타는 기도했다. 잠을 자거나 깨거나 걷거나 오직 하나만 기도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용하기만'을 원한 시인이었다. 어느 날 죽음이 갑자기 온다 해도 기쁘게 덥석 안을 수 있었으면 하고 기도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그렇게 하나이기만을 기도했다.


시인의 기도에 내 기원을 얹고 싶었다. 국내 여행하면서 흔히 만나는 풍경, 사찰에 오르는 중에 돌탑을 쌓는 한국인의 마음과 비슷하려니 생각하면서. 시인의 시어에 돌탑 쌓듯 내 마음 하나 얹어 놓았다.

단란한 원숭이 가족일까. 혹은, 부부싸움을 막 끝낸 원숭이 부부와 아기 원숭이일까. 오가는 원숭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써보았다.


나무로 울창한 숲을 뚫고 원뿔형 지붕을 이룬 황금탑이 솟아오른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 사원은 카트만두 서쪽 언덕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불교 사원이다. 주변에 성질 못된 원숭이가 많이 살고 있어서 원숭이 사원이라고도 했다.


약 2,000년 전에 세워졌으며,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라마교 사원으로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사원이라 카트만두 시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었으며, 우뚝 솟은 하얀 돔과 첨탑은 시내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에서도 잘 보였다.

라이언은 삼성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카메라가 일제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녀는,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카메라는 일제가 아니라 한국의 삼성이라는 기업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는 그 카메라로 나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나중에 그 사진을 내게 보내주었다. 뒷면엔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내가 만난, 첫 번째 한국인 여자친구'

 

그와 헤어지던 날, 너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내 짧디 짧은 영어실력으로 힘들었다. 나중에 널 다시 만난다면 좀 더 많은 대화를 원한다고 했더니, 라이언의 대답. 자기도 한국어 공부 더 열심히 해서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후에 라이언은 한국어를 비롯한 일본어,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학구적인 젊은이를 보면 나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라이언은 그렇게 날 기분 좋게 해주는 젊은이였다.

소풍 온 네팔리 청소년들 & 몽키 사원에 올라 바라 본 카트만두시 전경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한국의 고궁이나 사찰 같은 느낌이 났다카트만두 청소년들이 자주 찾는 견학장소여서일까? 교복 입은 학생들이 무리 지어 다니던 모습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은비와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사원 전망대 난간에 걸터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대학생인 듯싶은 네팔리 내게 된 발음의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되든 안되든 그와 어설픈 콩글리쉬로 나 역시 대화했다. 굳이 영어를 잘해야 의사소통이 되는 건 아닌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바디랭귀지의 달인이었던 나는 그와의 대화 도중 간간이 웃기도 했고, 서로 눈빛과 손짓 언어만으로도 서로 마음속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까. 나중엔 그의 여자친구와도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이국에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특별한 내용이 담긴 대화는 아니었다. 어디서 왔는지, 어느 곳을 여행했는지, 어디에 묵고 있는지, 카트만두에서는 어디에 갔었는지, 언제 떠날 건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나는 커플에게 무슨 공부를 하는지, 적성에 맞는지,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할 건지, 여자친구와의 교제기간은 어느 정도 되었는지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던 대화였다.


그럼에도 그게 지금껏 기억나는 것은 슬픔을 성취했다는 시인의 도시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여운이 남는 도시 카트만두, 요란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사기 치지 않고 그저 여행자의 위치에서 자유롭게 떠돌 수 있게 내버려 두는 도시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카트만두에서는 떠나는 전날까지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곳은 마음속에  '온쉼표'를 그려 넣었던 여유로운 도시로 기억됐다.



                                               

인도의 여러 도시와 네팔 카트만두를 여행하며 많은 것을 얻고자 하지 않았기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쌓였던 불순물을 조금이나마 제거하길 바랐다. 그래서였을까? 많은 것을 얻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 지나 놓고 보니,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특별하게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저 밑바닥에 자리한 의식의 문이 예전보다는 더 자유롭고 부드럽게 열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스무 해가 지났음에도 가끔 인도를 향한 그리움이 느닷없이 몰려올 때가 있다. 그렇게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그곳을 향한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딱 꼬집어 이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여러 가지 정서꾸러미가 그리움이라는 타이틀로 내 가슴을 쿵쿵 두드려댈 뿐.


그러나 인도로 다시 떠나겠다고 함부로 덤빌 수가 없다. 쉽게 떠날 수 있는 나라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으니까. 그럼에도 다시 떠나게 된다면 패키지여행보다는 여전히 자유여행을 원한다. 다람살라, 레, 마날리, 다즐링, 카트만두를 편한 교통편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여행 후 어느 날, 전경린의 글을 읽다가 인도 여행에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의 여행이 그래도 성공적이었음을 느끼게 했던 내용이라 반가웠다.


어떤 여행이든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고, 너무 겁을 먹고 조심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만나지 않는 나쁜 여행을 피했으며, 필요하다 싶을 땐 망설이지 않고 돈을 썼기에 여행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너무 초라하게 자신을 내버려 두지도 않았으며, 계획대로 움직이는 여행도 너무 우연에 맡기는 여행도 좋은 여행이 아님을 알았기에 시기적절하게 여행을 운영했고, 우리 모녀 각자만의 색이 담긴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하기 위해 힘썼다는 것을.


특히 "삶이 그렇듯 여행도 온통 문제 자체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관념이 아니라, 곧바로 경험이 되는 전신의 감각으로."란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의 책 제목  『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처럼 여행 후에 삶은 더 진하게 내게 다가왔다.


34일간의 여행에서 얻은 교훈들은 삶에서 힘든 고비를 겪을 때마다 비교적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인도여행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이지 않을까.


오랫동안 우리 모녀의 인도여행기를 사랑해 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인도여행기는 2003년 여행을 다녀온 후 다음카페 인도방랑기에 연재했었고 많은 분들이 읽고 호응해 주셨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어제일처럼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선명하게 펼쳐졌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인도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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