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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Jun 09. 2023

슬픔을 성취한 시인의 도시

Here and Now, 나는 제대로 삶의 방향성을 잡았는가

Nepal, 그 첫 번째 도시 Katmandu


 "사는 동안 무엇을 성취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슬픔이라고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   by 두르가 랄 쉬레스타


성취감을 느끼는 방법은 다양하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 때, 보통 성취감을 느낀다. 그런데 네팔리 시인, 두르가 랄 쉬레스타의 성취는 슬픔이라니... 시인은 그 슬픔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했던가. 중요한 것은 슬픔을 그가 원했느냐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두르가는 시 전면에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나 시어의 느낌을 따라 흐르다 보면 블루의 정서가 다분히 느껴졌다.


그저 독자 각자가 유추해 볼 일이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게 슬픔이었을까.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슬픔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받아들인 그 슬픔을 자기 안으로 끌어안고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슬픔의 언어들을 길어내 시어로 창조해 낸 것은 아닐는지. 그렇게 성취한 슬픔으로 자신만의 시를 써나가지 않았을까.


다즐링에서 다시 인도와 네팔의 경계를 지나 광활한 산맥과 녹색 지대를 달렸던 카트만두로의 긴 여정을 돌이켜보니 네팔리 시인 두르가의 시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눈물로 변할 것 같은 무거운 구름, 그 사이로 희망의 빛을 놓지 않으려는 듯한 몸부림처럼 내리 꽂혔던 햇빛과 한줄기 서늘한 바람, 결국 자연 아래서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나지막이 말하는 어느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시인의 목소리일 수도, 절대자의 무거운 일침일 수도 있었다. 순간 거대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부릅떴다. 그러나 결국 눈앞에 펼쳐진 자연 앞에서 침묵한 채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즐링 - 실리구리 - 라니간지 - (국경) - 카카르비타 - 카트만두


이번 여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또다시 후텁지근한 차량 안에서 1박 2일간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즐링에서 체력이 원상복구 됐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진맥진한 상태로 은비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은비는 여행이 끝나가면 끝나 갈수록 기운이 솟아났고,  나는 여행이 끝나 갈수록 지쳐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 다즐링에서 실리구리까지는 지프로 대략 2~3시간 정도 소요됐을까. 지프에서 내려 다시 라니간지로 떠나는 지프를 여럿이 함께 대절해서 국경 마을인 라니간지까지 갔다. 우리는 이 지프 안에서 깔림뽕이란 지역에서 자원봉사를 끝내고 카트만두 여행에 나선 밝은 미소의 친절한 캐나디안 라이언을 만났다. 카트만두에서 3박 4일간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뒤에서 자세하게 올릴 예정이다.


국경마을에서 내려 우리 모녀는 오토릭샤를 타고 인도 쪽의 패스포트 컨트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인도 비자 유효기간이 남아 있으면 출국일자 도장을 여권에 받는 아주 단순한 절차를 밟았다. 


다시 500m 정도 길이의 다리를 건너 네팔 쪽의 검문소로 가서 비자 발급서류를 작성 후, 즉석에서 발급받고 지극히 형식적인 입국 수속을 밟았다.


카카르비타라는 국경마을의 가장 가까운 은행에서 우선 네팔 루피로 환전했다. 두 곳의 여행사를 들러 카트만두까지의 버스비 시장조사를 한 후, 오후 5시에 떠나는 카트만두행 야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네팔 비자 1인 US$30, 카트만두 Local Bus 1인 267 네팔루피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조선족이 경영하는 음식점 '백두산'이다. 한국인 여행자들에게는 꽤 유명한 음식점이었다.

야외에 준비되어 있는 식탁에 앉아서 바라본,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다. 빨랫줄에 가볍게 흔들리는 천들이 매달려 있는 풍경을 네팔에서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음식점 백두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여러 해 전 제주 월정리 바다마을 어떤 카페에서도 저런 천들을 야외에 설치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카페지기가 인도나 네팔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거나 그쪽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사람, 혹은 그쪽 나라에 관심이 있거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려니 추측하면서 지나쳤던 기억이 났다. 


많은 사람이 백두산 음식을 하도 칭찬해서 나름 기대했는데 생각만큼 우리 모녀를 흡족하게 해주진 못했다. 우리가 백두산에서 먹었던 음식은 짜장면, 한국식 수프, 탕수육과 라씨였다. 너무나 한국적인 음식을 기대했기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한국인에게는 주문한 음식과 함께 김치를 서비스로 제공해 주었다. 서빙하는 네팔리가 하도 말이 많아 나중엔 대꾸해 주는 게 힘이 들 정도여서 짜증이 날 뻔했던 기억도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백두산 주인 내외가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외가댁 할머니께 느꼈던 푸근한 정서가 떠올랐다. 몸은 지금 여기에 있지만 마음만큼은 벌써 20년 전 카트만두 백두산으로 순간이동하여 그 골목길을 순회하고 있었다.


친절한 '백두산' 주인아저씨가 카트만두 시내 지도를 펴서 우리가 둘러보아야 할 관광지를 꼼꼼하게 안내해 주셨다. 우리 모녀는 우선, 카트만두(네팔)에서 가장 크다는 Tribhuvan University를 견학하기로 결정했다. 백두산 주인 내외는 우리 모녀에게 택시를 친절하게 대절해 주셨고 우리는 저렴한 택시 비용으로 대학 캠퍼스를 둘러볼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 Tribhuvan University 왕복 택시 요금 350 네팔루피

Tribhuvan University로 가는 택시 안에서 카트만두 시내 거리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네팔 전통 모자를 쓴 네팔리 기사 아저씨가 무척 친절했다. 차를 내려서 모자 쓴 모습을 기념으로 한 장 찍고 싶다고 하니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Tribhuvan University에 들어서자 강렬한 햇빛이 전신에 쏟아졌다. 햇볕을 피해 인문관에 들러 강의실에 들어섰다. 아직 강의 전이라 학생들이 수업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학생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남학생들은 한국에서 온, 은비란 여학생에게 관심이 많았다. 은비도 학생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 학생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학점을 취득할 수 있어서 여러 해에 걸쳐 대학에 다녔다.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벤처기업 등을 창업해서 돈벌이를 하는 데 더 열중하기도 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아이들은 이 대학에 잠깐 적을 두었다가 대개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다.


수업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주로 새벽부터 오전까지 한다고 했다. 그 당시 몇몇 인기과를 빼고는 취업도 잘 안되기 때문에 일부는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 준비를 하거나, 나머지 보통 집안의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러 해에 걸쳐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Tribhuvan University 중앙도서관에 들어섰다. 일단 시원해서 오래 머물고 싶었던 공간이었다. 쾌적했던 그들의 도서관을 오랜 시간 감사한 마음으로 이용했다. 친구들에게 엽서도 쓰고, 준비해 갔던 책도 읽고 도서관 책장을 오가면서 책 구경도 했다. 내용을 읽었다기보다는 쓰인 게 아니라 그려진 것 같은 활자의 모양을 감상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테지만.


편안하다. 안락하다. 여유롭다. 정적이다. 평화롭다. 책 읽고 싶다.


도서관에 있는 시간 동안 내내 가졌던 느낌들이다. 도서관에 앉아서 네팔로 오기까지의 여정을 간단하게 수첩에 메모했다. 수첩을 넘기다가 마음이 머물던 문장 앞에서 멈춘 채, 곱씹으며 되뇌었다.


누구의 글이었는지 불분명하지만 글쓴이의 소망 셋에 대한 글을 옮겨 적어놓은 메모였다.

'아프리카 땅을 밟는 것, 흙과 함께 사는 삶, 흙냄새 나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 소망이라던 글이, 문득 인도와 네팔의 대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소망들이 내 가슴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드는 걸 보면 중년 여성들에게 공감을 주는 글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메모를 해둔 거겠지.

칸나. 나는 이 꽃을 인도와 네팔을 '닮은 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강렬한 햇볕을 받아 더욱 붉게 타오르던 꽃. 뜨거움과 열정과 다양한 종교와 더 나아가 그들의 종교의식과 그네들의 눈빛처럼 열정적인 꽃, 칸나. 


가끔, 국내 여행 중에 우연히 칸나꽃을 만나게 되면 인도와 네팔에서의 추억이 밀물처럼 다가오는 까닭도 아마 저 꽃이 그들의 나라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Tribhuvan University 캠퍼스 잔디밭에서 칸나 꽃을 닮은 여대생들을 만났다. 잠시 그들과 어울려서 이야기 나누는 은비의 모습이 사리를 입은 그녀들과 함께 녹색잔디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준 사진들이 더러 있는데 여대생들과 찍은 사진도 그런 사진 중 하나이다.

Tribhuvan University. 뜨거운 태양열을 감내하며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등줄기에서 몇 줄기의 땀비가 흘러내렸다. 온몸이 쭈뼛해질 만큼 뜨거운 햇빛이 전신에 내리 꽂히는 순간을 감각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강렬한 햇볕아래 설 때면 언제나 네팔 카트만두 대학 캠퍼스에서의 시간이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주 뛰어난 엽서와 사진이 많이 전시돼 있던 상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상점은 다른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화장실도 청결했고, 건물 내 냉방장치가 잘되어 있어 유독 쾌적했다.


카트만두에 닷새 머무는 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레스토랑 '웨이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갓 구워낸 다양한 빵들, 시나몬롤과 파인애플 브래드와 크림치즈 샌드위치, 맛있는 파스타, 시큼한 라씨와 기타 음료들. 주문한 음식이 모두 입맛에 맞았다.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은비는 밀크커피, 나는 블랙커피. 모처럼 커피다운 진한 커피로 상쾌한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던 며칠이었다. 


아침 산책로는 어제와 또 다른 표정으로 우리 모녀를 환영했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산책로를 녹색 나무가 즐비한 숲 속을 연상하면 좀 곤란하다. 상가와 게스트하우스와 고급호텔이 줄지어 있던 복잡한 거리를 감히 산책로라고 말하는 것이니까. 아침에 가라앉은 느낌의 거리를 걷는 기분은 들뜬 낮에 걷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여행에서 같은 거리를 새벽, 아침, 낮, 밤에 걷는 것을 즐긴다. 같은 거리, 같은 장소이지만 시간에 따라 조금씩, 때로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패키지여행을 선호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낮의 풍경만 혹은 밤의 풍경만 보고 그 도시를 여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낮과 밤 풍경도 다르지 않은가? 풍경뿐이랴. 우리의 마음과 외관 역시 낮과 밤엔 확연히 달라지지 않던가.


그래서 고생이 좀 되더라도 그 도시에서 하루 이상 머무는 것을 여행의 작은 목표로 삼았다. 그래야 적어도 그 도시의 하루 모습을 만나고 느끼고 눈에 담아볼 수 있을 테니까.


하루의 시작을 서서히 준비하는 거리 풍경을 만나면서 오늘 이 거리에서 만들어 갈 추억들을 상상했다. 이른 아침 산책은 언제나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이 펼쳐질지, 누구와 짧게라도 대화를 나누게 될지, 어떤 유쾌와 불쾌를 경험하게 될지, 어떤 공기와 바람을 맞이하게 될지.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가슴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매일 아침마다 지나쳤던 장소, 눈을 감고도 자주 들렀던 레스토랑과 기념품 상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사진 속, 거리를 기억해 낼 수 있다. 그만큼 자주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인종들을 만날 수 있던 거리, 그러다 서로 눈빛이 마주치면 흔쾌한 미소를 건넬 수 있었던 거리.


거리를 걸으며 동물을 직접 잡는 그들의 음식문화를 자주 접했다. 그러다 거의 실신할 만큼 놀랐던 장면이 있었다. 금방 잡은 동물 전신에 주황색 향신료를 발라놓았던 장면이었다. 첫날은 그 광경을 보고 그저 피하기만 했는데 이틀째, 사흘째부터는 그 풍경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팔리의 음식 문화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됐으니까. 그러나 지금도 그 주황색 향신료를 발라놓은 식용 동물의 몸통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인간이 간사한 동물인 건 분명하다. 동물 잡는 장면을 보고 놀랐어도, 맛있는 음식냄새 앞에서는 어김없이 코를 킁킁거리게 되니 말이다. 거리 곳곳에서 입맛을 자극하는 냄새가 번져 나올 때, 내가 살아있는 동물임을 자각했다.


무엇보다 '인도'라는 나라에 비해 모든 면에서 짓궂지 않고 점잖은 릭샤꾼들과 상점 주인들에게 신뢰감이 들었다. 이곳에서 한 달간 머물라고 해도 불편하지 않을 도시가 바로 카트만두였다.


다리 쉼을 할 수 있는 쾌적한 기념품 가게에도 종종 발걸음 했다. 냉방으로 시원한 기념품 가게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우리 모녀는 때때로 서로 헤어져서 거리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기웃거려 보다가 중간 지점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귀텔하곤 했다.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는 여행객들의 미소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일까? 녹색 여유 속, 청색 눈빛 미소라고 할까. 청색 여유 속, 갈색 눈빛 미소라고 할까. 갈색 여유 속, 회색 눈빛 미소라고 할까. 여유도, 눈빛도, 미소도 조금씩 다른 여행자들의 시간이 흩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시간과 함께 어디론가 흩어지겠지. 그 속에 우리 모녀의 눈빛과 여유, 미소와 시간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2015년 4월 네팔 카트만두 인근에서 리히터 규모 7.8. 역사상 가장 강한 지진으로 기록될 만한 괴멸적 피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한 차례로 끝난 게 아니라 이어지는 지진과 여진으로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서늘한 기억이 생생했다. 그곳을 여행했던 여행객의 마음이 이럴진대 실제 현장에서의 네팔리들 심경이야 오죽했으랴.


여행했던 그 시기의 카트만두의 거리, 학교와 상가, 자전거로 이동하는 네팔리들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 끔찍한 지진으로 피해지역 가옥 대부분이 주저앉았다니. 이는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내진설계를 고려하지 않고 지은 건축물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강진이 발생하기 1주일 전 세계적인 지진 전문가들이 카트만두에 모여 대응책을 논의했지만 대피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최근 네팔 여행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네팔리들은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어쨌든 산 자는 살아나가야 하니까. 서두에서 언급했던 네팔리 시인 두르가 랄 쉬레스타의 시구처럼.


"사는 동안 무엇을 성취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슬픔이라고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   


슬픔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슬픔은 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피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때때로, 불현듯, 갑자기 슬픔은 우리 목전에 나타나서 가슴 깊이 파고든다.


슬프다의 사전적 정의는 '원통한 일을 겪거나 불쌍한 일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이다. 살아가는 동안 가끔, 혹자는 자주, 혹은 너무 자주 슬픔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 슬픔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매우 중요한 정서다. 슬픔 불감증인 사람이 있을까. 슬픔을 못 느낀다면 기쁨도 행복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어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으랴.  


열네 살, 문학 강연을 듣고 감명받았던 시인 두르가는 종이 구할 돈이 없어 담배 종이에 시를 써 내려갔다고 한다. 시인은 자신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가난하고 무지한 농부에게서 삶을 배웠다말했다. 자신의 시를 학자의 저울에 달 수는 없다고. 그래서 그의 시어는 나 같은 범인에게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와닿았다.


그의 스승은 어쩌면 어렵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네팔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의 시에는 힘이 있다. 그의 시어가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비극과 참담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게, 일어설 수 있게, 다독거려 줄 것이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삶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고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위해 한 걸음씩 내딛는 게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이다. 네팔리들처럼 나 역시 당장의 한 발자국을 떼는 것, 그것이 새롭게 주어진 오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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