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들래 Apr 26. 2023

또 다른 인도, 다즐링

혼돈의 도시를 벗어나 질서의 도시로

목적지 뉴잘빠이구리 기차역에 도착하자, 벌떼같이 삐끼들이 몰려들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실리구리에 가서 산악열차를 타고 다즐링에 가려고 했으나 너무 지쳐있었다. 가장 빨리 다즐링으로 출발하는 지프차에 합승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끈적거리는 좌석과 사람냄새에 지쳐있다가 조금씩 높은 지대로 오르니 서서히 찬기운이 감돌았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끈적거렸던 몸이 뽀송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 모녀는 서로를 보고 이제는 살았다 하는 표정으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어두운 저녁 여덟 시, 한여름의 도시 뉴잘빠이구리에서 늦가을 도시처럼 느껴졌던 다즐링에 드디어 안착했다. 이번 인도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다즐링, 다즐링은 또 다른 인도였다. 인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더러움과 악취, 걸인이 많은 도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도시라고 할까? 약간 과장을 보탠다면 지옥에서 천국에 온 기분이 이런 걸까? 한 마디로 '혼돈의 도시, 바라나시'를 벗어나 '질서의 도시, 다즐링'으로 입성한 기분이었다.

후에 딸아이의 기록을 들추어보다가 공감 가는 내용이라 옮겨보았다.



무갈사라이 역에서 뉴 잘빠이구리역까지 19시간 동안의 기차여행은 인도 여행 중 가장 힘들었고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토록 고생을 한 뒤 만나게 된 다질링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시원한 날씨, 맛있는 음식, 예쁜 카페, 친절한 호텔 주인... 뉴잘빠이구리역에서 다즐링까지 지프를 타고 세 시간 이상 달렸을까? 해가 지기 전, 뽀송뽀송하게 말라가는 땀 때문에 기분이 한 층 나아질 때쯤, 차창 밖으로 보이던 살아있는 듯한 구름의 움직임을 잊을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차 안의 냄새와 참기 힘들었던 더위와 소음과 매연과 씻지 못해 찝찝했던 몸 때문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있던 나는, 그 순간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인도'라는 나라에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더랬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호기심 많은 인도인들에게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혼자서 중얼중얼 참으로 신경질을 많이 냈더랬다. 지금까지 20일 정도의 일정동안은 그저 즐겁기만 했었는데... 나는 왜 인도에 왔을까. 내겐 끔찍할지언정, 그 더럽고 끈적거리는 침대칸 기차 또한 그들의 문화인 것인데... 


그저 나와 맞지 않는 모든 것은 짜증으로 덮어 버리는 내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왜 돈을 들여서 여행을 하고 있나. 나란 인간은 참... 못난, 작은 인간이구나. 그 구름은 천천히 움직이며,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훈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하고, 무엇보다 아름답고, 감정의 변화를 나처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자연 앞에서 나는 한없이 못나고 작아질 뿐이었다. 



다즐링은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약 500km 떨어져 있는 해발 2,000m 지점의 고원이다. 다즐링이라는 지명은 천둥을 뜻하는 티베트어 '다즈'와 땅이라는 의미의 '링'이 합쳐진 단어로 '천둥이 치는 곳'이다. 천둥 치는 곳이라는 도시명처럼 날씨가 매우 변덕스럽고 일교차가 큰 곳이기도 하다. 


말라야로 이어지는 산등성에 위치해 있는 다즐링.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기온이 낮지만 한낮에는 뜨거운 햇빛으로 일교차가 심하다. 거기에 짙은 안개와 높은 습도, 적당한 강우량으로 깨끗한 공기를 자랑하는 환경에서 재배되는 홍차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다즐링티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곳에 머무는 며칠간 비와 안갯속을 거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흐린 날이 많았다. 그러나 비와 안개를 걷어내고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르고 투명한 하늘빛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기후가 다즐링티의 섬세한 풍미를 더해주는 것일지도 모르지. 


거대한 산맥 사이로 구름과 안개가 수시로 이동하는 모습은 때로는 요란하고 거칠게 때로는 속삭이듯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우측 산맥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뿌연 안개인 듯, 낮은 구름인 듯한 게 바로 눈앞으로 스치듯 지나갔다. 다시 좌측 산맥에 시선을 던지면 옅은 안개가 마을을 휘감고 피어올랐다. 


첩첩산중이란 표현이 적확한 도시 다즐링, 우리가 머무는 동안 다즐링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처녀의 태를 품고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살짝 보여주다가 구름으로 가리고 또 가슴께 까지 열었다가 금세 안개로 감싸버리면서 단 한 번도 전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몇 장의 사진을 펼쳐놓고 보면 거의 비슷한 듯하지만 구름의 이동모습이 조금씩 달랐다. 산책하면서 우리 모녀는 솜사탕 같은 구름을 참 많이도 따라다녔다. 몬순의 우기에 그곳을 방문해서 빛나는 설산 칸첸중가를 선명하게 만나지 못했지만, 우리 모녀에게 행운이 따라 준 것일까?

다즐링을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던 순간을 경험했다. 하얀빛을 발하던 세계 세 번째 고봉 칸첸중가의 눈부신 광경을 가슴 저린 감동과 함께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우리 모녀를 찾아왔다.


구름이 완전히 걷힌 설산의 웅장함을 선명하게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8월에 칸첸중가를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게 확실했다. 날이 좋을 때는 멀리서나마 에베레스트까지 조망해 볼 수 있다는데. 하여튼 고원의 찬란한 멋과 향과 정취를 지닌 도시임에 틀림없다. 

이전 07화 천 개의 얼굴, India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