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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Apr 26. 2023

여행자의 휴식처, 초우라스타광장

5박 6일간 도보여행의 기쁨을 맛보다

비탈진 언덕길이 대부분인 다즐링을 우리 모녀는 5박 6일 머무는 동안 대부분 걸어 다녔다. 비가 자주 내리긴 했어도 다즐링의 선선한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인도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밤에는 딸아이를 끌어안고 잘 정도로 추웠다.

화창하게 갠 맑은 날을 만나긴 좀처럼 어려웠지만 비 오는 날 창 밖 풍경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숙소 앨리먼트 5층 카페에서 바라보는 다즐링의 전경이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다정하게 모여있는 마을 풍경이 다즐링 주민들 모습을 닮았다.


숙소 앞, 주택에 널어놓은 빨래는 제대로 마른 경우가 한 번이나 있었을까, 싶을 만큼 비가 내리고 또 내리다가 잠시 멈추고 햇빛이 들이치는가 하면 먹구름이 가리고 다시 비가 내리기를 반복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숙소 앨리먼트 식당의 스페셜 티베탄 브래드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빵이 하도 커서 하나를 시켜서 둘이 나누어 먹어도 될 정도였다.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마시는 다즐링 블랙티의 향기와 시간은 또 어땠겠는가. 그동안 힘들었던 인도에서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다즐링에서의 모든 시간은 작은 행복들의 조합이었다.


아침마다 혹은 저녁마다 우리 모녀는 숙소 창 밖에서, 혹은 옥상에서 다즐링의 풍광을 즐길 수 있었다. 더구나 날씨가 맑으면 직접 고봉 칸첸중가를 이 식당 창문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Aliment Hotel 더블룸 1박 Rs200)


지도를 기가 막히게 잘 그렸던 숙소 주인 스물아홉 살 청년은 이십 대 초반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일모레 서른이라니 놀라웠다. 그만큼 동안이었다. 다즐링에서 우리가 여행할 장소를 꼼꼼하게 지도로 그려주던 그의 세심함에 놀랐다. 그의 지도를 오래 간직하려고 사진으로 남겨두었는데 사진 파일을 일부 잃어버리는 바람에 소개할 수가 없어서 아쉽다.

다즐링. 그 지명은 원래 티베트어로 Darje Ling이었던 것이 영어화된 것이다. 1835년 시킴령이었으나 더위에 약한 영국인들이 이곳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피서지로 개발했다는데. 그래서일까. 이 도시는 아직 식민지 시대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과 교회, 학교도 많이 눈에 띄었다.


경사진 곳에는 대부분 대규모 다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다즐링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차밭 풍경을 산책 중에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의 보성 다원이 작은집이라면 이곳 다질링의 다원은 어마하게 큰집 같은 분위기였다.

다즐링에서의 4박 5일은 인도 여행 중 가장 생기 있게 지냈던 도시로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모녀는 거의 매일 초우라스타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였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것들, 움직이는 것들, 멈춰있는 것들을 취향에 맞게 바라보고 느끼고 듣고 감각하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초우라스타 광장이었다.


네팔인, 뱅골인, 시킴인, 티베트인 등 다양한 인종들과 우리 모녀를 비롯한 각국의 여행자들, 거기에 피서차 온 현지인들까지 섞여있어서 더 조화롭게 느껴지는 공간, 그곳 풍경을 캔버스에 표현한다면 멋진 색들로 채색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지 않을까. 테마는 분명 '평화' 혹은 '행복'이 될 것이다.


초우라스타에서 시간을 보내노라면 행복이란 아주 작은 순간, 소소 것 하나에 감동하는 것임을 미풍처럼 부드럽게 깨우칠 수 있다. 그 작은 것이 하나 둘 모이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꾸러미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초우라스타 광장이었다.


미미한 바람 한 줄기가 두 뺨을 스치는 그 찰나의 행복은 너무 작아서 금세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작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하고 느낄 수 있었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이 곳곳에 도사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다즐링이다.

초우라스타 벤치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소년에게 말을 건넸던 은비, 이 소년의 미소를 마주한 순간 우리 모녀의 마음에 행복과 평화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머플러는 소년의 사랑스러움을 돋보이게 했다. 순수한 눈빛이 참으로 아름다웠던 소년이었다. 20년이 흘렀으니 멋진 청년으로 성장했으리라.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천양희 시인이 그랬지. '진실에도 색이 있다면 초록일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지금 아이의 눈빛을 보고 그 시어를 패러디해 보았다. '진실에도 빛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의 눈빛일 거라고.'

초우라스타 광장엔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다즐링은 티베트와 인도인들뿐 아니라 네팔에서 건너온 네팔리들이 아주 많다. 우리의 숙소 주인도 네팔리였다. 그래서 다즐링의 핵심적인 랜드마크 초우라스타 광장에 네팔 시인 바누벅타 어챠르야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네팔 현대 문학은 1814년 탄생하여 1868년 고인이 된 바누벅타 어챠르야(Bhanu Bhakta Acharya)에 의해서 태동했다. 시인은 네팔인으로서 최초로 네팔어로 시를 썼다. 네팔에서 바누벅타 어챠르야 이전에 산스크리트어로 시를 쓴 사람이 없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시인은 사랑과 자연, 사람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과의 소통을 시로 표출해 나갔다.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작품의 영감을 얻었으며, 젊은 시절 카트만두의 아름다움이 그의 정신과 영혼을 사로잡았다. 이후 카트만두에 상주하면서 여러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서로의 저술과 창작활동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시인은 삶에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의 네팔 문학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도 그를 억압했지만 그의 생일을 네팔 국경일로 지정할 정도로 존경받는 시인이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한국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네팔엔 바누벅타 어챠르야가 있다고 하더라. 그만큼 네팔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었다. 다즐링 초우라스타 광장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네팔리 시인 바누벅타 어챠르야를 알 수 있었겠는가. 여행지에서 새로운 문인을 알게 되면 그 지역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거나 작가의 작품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기념품 상점 앞, 우체통 & 다질링 병원

초우라스타 광장에서 건강한 친구들을 만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젊음이 눈부셨던 친구들이었다. 처음엔 쌍둥이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단짝 친구였다. 길 위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한국 여대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으로 보니 세 자매의 모습처럼 보였다. 둘은 단짝친구답게 왠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잘 통할 것 같았다.


다음 목적지가 다람살라라고 했던가. 우리 모녀가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오르는 여행을 하고 있다면 이 친구들은 윗마을에서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느 여행길을 택하여 걷든 자기 안으로도 길을 내는 친구들이길 바랐다. 때때로 마음상태를 점검해 보고 자신 안의 길이 막혀있지 않은지 확인해 보는 게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우리 모녀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니까. 내 안의 길이 막혔을 때는 열린 길도 닫혀 보일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마음풍경을 잘 읽어야 했다. 지금 바라보는 세상이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보일 때는 내면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힘듦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하고 있다면 내면이 평화롭다는 의미이니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통해 내 마음 상태를 수시로 점검해 볼 수 있다.


여행 중에는 더 면밀하게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고 걸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여행이 그랬고 앞으로 남은 일정에서도 그래야 했다. 여행에서 뿐이랴. 우리의 인생 자체가 마음공부 과정이지 않은가. 여행하는 길 위에서는 일상에서보다 마음을 들여다볼 일이 더 잦을 수밖에 없다.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으므로 수시로 점검하면서 나아갈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


두 친구와는 여행이 끝난 후에도 가끔 서로 소식을 나누었고, 현재까지 건강하게 사는 그녀들의 모습을 온라인상에서 만나고 있다.

다즐링에서는 사람보다 더 좋은 팔자가 개팔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우라스타광장은 완전 개판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 초우라스타 광장엔 사진 속 풍경과 비슷한 모습이 재현되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 정도로 다즐링 광장은 개들의 천국이었다.


일 년에 한 번 행해지는 축제 행렬이 광장을 지나쳤던 날이 있었다. 여행객으로는 쉽게 만나기 힘든 힌두축제라고 했다. 초우라스타 벤치에 앉아 길게 이어졌던 축제 행렬을 영화 관람하듯 다즐링 터줏대감인 개들과 함께 구경했다. 잿빛 흐린 광장에 주홍빛 행렬이 오래도록 이어지자 잠깐이었지만 드라마틱한 영화의 한 장면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다즐링에 머무는 동안 오다가다 목례를 하거나 가벼운 인사말을 건넸던 라마승이 연락처를 물었다. 서로의 메일주소를 교환하고, 거리에서 만난 청소년과는 함께 기념사진도 찍으면서 그곳에 오래 머문 여행자처럼 익숙한 거리를 얼마나 자주 오가며 산책했던지. 

다즐링에 왔으니 찻집에서 홍차를 마셔보았다. 오렌지색을 띠고 맛이 부드러웠고 뒷맛이 살짝 달았던 미각과 후각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대인 다즐링 지역에서 생산된 홍차는 보통 3~11월이 수확기이며, 3월 중순에서 4월에 첫물차가 생산되지만 6~7월 생산되는 두물차의 향기가 가장 강하다고 했다.


우리가 여행한 계절이 7,8월이었으니 그때 우리가 마신 홍차가 그즈음 생산된 찻잎으로 만든 차였으리라. 사실 다즐링의 기후와 분위기로 차를 마셨지 차맛을 제대로 알고 마신 것은 아니었다. 차맛보다는 다즐링에서의 차 마시는 분위기가 좋았다. 미각보다는 후각과 시각으로 음미하는 차를 즐긴 셈이었다.


여행 이후 다즐링 관련 사진이나 책자를 보면 관심이 가서 펼쳐보곤 했다. 세계 3대 명차의 하나인 인도 다즐링홍차를 현지에서 직접 마셔보았다는 것은 그 지역의 향기와 추억을 함께 마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스리랑카 우바홍차와 중국 기문홍차도 현지에서 직접 마셔보는 기회를 마련해 봐야겠다.


카페 GLENARY'S, 녹색체크 테이블보와 하얀 등나무의자가 예뻤고, 실내 분위기가 깔끔하고 고급져서 긴 시간 머물며 몇 차례 휴식을 즐기곤 했다. 세팅을 마치면 홍차 맛있게 마시는 방법을 친절하고 자상하게 알려주었던 웨이터가 담긴 사진 한 장을 보는 동안, 그때 그 시간으로 순간 이동시켜 주면서 유쾌한 추억을 곱씹게 했다.


사진의 위력이다. 여행지에서 내가 담긴 인물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사진 속 어느 위치에 서 있거나 앉아 있던 내 모습을 유추해 보는 것만으로도 오감을 확장하는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게 했다. 코로나 이후, 사진 속으로 여행 떠나기를 즐겼었는데 여행지에서 찍어온 사진은 언제나 쏠쏠하지만 달콤한 흥밋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도 잠깐 멈추고 앨범을 펼쳐보면 어떨까. 사진에 담긴 추억 속으로 순간 이동하는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맛있는 빵, 그리고 향기가 좋은 녹차와 홍차를 즐겼던 GLENARY'S 앞에서

오늘도 얼그레이 한 잔을 앞에 두고, 향기를 마시고, 빛깔을 마시고, 찻물을 마시며 다질링에서의 기억을 반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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