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교회에서 받은 심리상담 덕분에 나의 우울과 강박 증세가 많이 회복됐다. 그러던 중 심리학에 관심이 부쩍 생겼고 심리학 특수대학원 석사에 지원해 보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남편은 주중에 늦게 들어오고 토요일에도 일한다. 내가 아이를 돌봐야 하니 대학원에 다닌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평일 낮에 다닐 수 있는 한 대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소개서와 학습계획서를 쓰려고 하니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학부 전공이 심리학도 아니었고, 관련 자격증도 하나 없었다. 입학 지원 결과는 서류 불합격.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내가 뭘 믿고 지원한 건지 싶었다. 스스로 헛웃음이 나왔다.
한 번의 참패로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 토요일에 다닐 수 있는 대학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토요일 아이 합창단 픽업 시간과 딱 겹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20년 동안 일했는데, 나는 왜 공부 하나 마음대로 못 하는 걸까? 나는 돌봐야 할 아이가 있으니까, 남편이 바쁘니까 내가 대학원에 갈 수 없어서 억울했다. 좌절감이 컸다. 이건 '자기 이상과 실제 자아 간의 불일치'에서 오는 좌절감이다. 심리학자 E. 토리 히긴스는 인간이 이상적인 자아(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자아(현재의 나)가 다를 때 불안과 우울 같은 감정을 더 쉽게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한 달 가까이 힘들었는데 불현듯 내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올라왔다. '내가 진짜 대학원에 가고 싶었던 걸까?' 그 물음에 한참 고민했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솔직히 부끄러웠다. 나는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대학원 공부까지 하는 ‘대단한 엄마’, ‘멋진 아내’로 보이고 싶었다. 이런 내 모습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바람직성(social desirability)’과 맞아떨어졌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멋있게 보이고, 인정받고 싶어서 자신의 진짜 욕구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타이틀을 좇는다고 한다. 내가 딱 그랬다.
타이틀을 빼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초심을 돌이켜봤다. 심리학에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비슷한 아픔을 겪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돕는 사람이다. 나는 사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꼭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학위를 얻어야만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속한 교회에서도, 소그룹에서도, 누군가의 곁에서도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음을 고쳐먹은 덕분일까. 대학원에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한결 편해졌다. 억울함과 좌절감 대신, 자신을 향한 응원이 올라왔다. 이제 나는 내가 속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타이틀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