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넘어졌다. 술을 그리 마셔도 취하지 않고 비틀대지 않던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아빠!"
나이 사십이 넘은 딸이 아직도 아빠라고 부르는 그는 팔을 바닥에 뻗고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 했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흡사 레슬링 선수처럼 바닥에 파테르 자세를 취하면서 땀을 흘렸다. 얼핏 보아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벌게진 얼굴은 술을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그렇게도 좋아하던 술을 자제하고 멀리 했다. 지지할 것을 찾아 허우적 대던 손은 근처의 벽을 짚으려다 다시 미끄러졌고 그의 몸은 크게 기우뚱했다.
"괜찮아."
그는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나지막이 내뱉고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짚고 겨우 일어섰다.
"자네가 부축해 드려."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화장실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는 계속 비틀거렸다. 보는 사람들은 불안 어린 시선을 보냈고 중간에 낀 남자는 도우러 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중간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화장실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인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5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는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단계인 듯하다. 그는 부인의 단계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왜 검사를 받아? 그까짓 것 며칠 쉬면 돼."
"신경 쓰지 말래도! 지난번에도 쉬니까 다 괜찮아졌어."
80이 넘은 나이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본인의 나이가 80을 넘었다는 것을 아직 숫자의 변화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조부모가 그러했고 부모도 그러했으며 친인척을 비롯해 주변에서 그 나이가 되면 건강 상태가 급변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지만 갑자기 말을 안 듣는 본인의 팔다리를 안간힘으로 움직이면서도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지난여름 그는 가족들과 같이 휴가를 다녀왔다. 이제 비행기를 타고 멀리 해외여행 가는 것은 부담이 되었으나 국내 여행을 다니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아니 없어 보였다. 무료한 일상을 힘들어하다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활력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의 신체가 다시 젊어질 리 없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갑자기 그의 몸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아빠, 왜 그래?"
"어제 많이 걸어서 그런가 좀 피곤하네."
"괜찮아?"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몸이 찌뿌둥하네."
거짓말이다. 그는 단순한 피로로 그렇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그의 믿기지 않는 행동에 가족들을 걱정을 시작했고 주변의 거듭되는 병원 종합 검사 권유를 거절하다 어느 날 결국 그는 쓰러졌다.
가족들은 검사를 권유하면서도 처리 과정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알아서 오시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집에서부터 검사받는 서울의 병원까지 3시간 넘는 거리를 모셔 오는 방법부터가 난관이었다. 누군가 3시간 거리를 내려가 모셔올지, 거동이 불편한데 기차나 버스를 이용한다면 승하차에 무리가 없을지 예측이 전혀 되지 않았다.
어찌어찌 병원 입원까지는 되었으나 병원에 입원하여 검사하는 동안 간병인을 둘 것인지 가족이 돌볼 것인지까지 결정도 매우 어려웠다. 본인은 금방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간병인이라 존재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생업이 있는 상황이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간을 조금씩 내어 돌아가며 간병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으나 병원에서는 하루에 한 번 정도만 교체가 가능하다고 통보하였다. 한 번 병원에 들어오면 12시간 정도는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연한 결과지만 몇 명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검사기간 일주일을 어찌어찌 보내기로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딱 일주일이다. 한정된 시간 모두가 최대한 돕고 노력하기로 다짐하고 서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과연 그가 병원에서 나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들 말을 아꼈다.
그는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다들 그 선택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남자는 문득 몇 년전에 돌아가신 자신의 조부모를 떠올렸다. 남자의 조부모는 몇 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맏며느리의 헌신으로 20여 년을 더 가족과 함께 보내다 여한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는 몇 번 넘어졌을 뿐이지만 그가 넘어질 때마다 온 집안이 휘청거리는 것이 남자의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