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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이프라인 Jul 29. 2023

서이초 초등 교사가 남기고 간 두 번째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당신은 부자입니까?


 이 말은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하기 어려 질문입니다. 대부분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니오."라고 답하실 거라고 예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위 1%에 드는 부자순자산 약 29억 원고작 3글자 불과한 이 기준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체감 니다.


https://m.khan.co.kr/article/202305201036001


  하지만 29억이라는 돈이 조건 없이 주어진다면 그 돈에 만족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갑작스레 주어진 큰돈에 기뻐하다가도 이 돈을 불리기 위한 투자를 생각하게 다.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3/05/04/5B6D5GZ5FZHYNGDTHFB2RMH6HU/


 이미 부자가 되었음에도 우리는 더 부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인간의 안정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경제적인 부분이 조금 더 나아지고 여유가 생긴다우리는 처음 질문에 부자라고 대답할 수 있을요?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라고 한다면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재물이 조금 많은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도 여유가 있고 남을 도울 정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는 '기부를 하거나 남을 돕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라고 쓰여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혀 패가망신할 운명으로부터 자유를 주고 인격을 함양하며 선한 사람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 준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기부를 자신을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며 능력에 맞게 최대한 남을 도우려 노력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남을 돕는 것에 대한 시각은 어떠한가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현실화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쉽사리 돕지 못하고 교사가 학생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자칫하다 누명이나 편애, 아동 학대 등으로 오히려 해명하는데 노력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부나 도움 역시도 왜 도와주어야 하는지, 대상 선정에 문제점은 없는지, 도와준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등 행동 후에도 잡음이 일어나지 않게 끊임없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돕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배려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법을 지키면서도 법 안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고 싶어 하며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는 선에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별다른 저항 없이 지속되면서 꼭 지켜야 하는 적법적 행동과 지탄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 행동들 뿐만 아니라 호의로 베푸는 배려 역시 받을 수만 있다면 앞다투어 서로 먼저 고 싶어 하는 사회적 가치관이 형성되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영화 '부당거래'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대사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선의로 시작한 여러 사회적 배려와 정책들을 어느새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고 마음대로 안 되면 화가 나는 거지근성만연한 사회를 대놓고 비꼬는 말입니다.(나무 위키 뜻 4 :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화가 남.) 영화에서 보여주듯 배려나 호의를 내가 먼저 받으려는 수준을 넘어서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하고 누리지 못하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우리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 초등 교사의 일기장에 쓰인 학생의 난리는 진짜 교사와 학생 간의 문제였을까요? 교사가 지도를 하고 바르게 대처를 해도 이의를 제기해 교사를 어렵게 하는 다른 사람이 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학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대로 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잘못해도 아무도 처벌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방임된 상태에서 인간이 행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교사는 왜 지도를 해야 할까요?"


 너무나 당연한 말에 대답을 오히려 못 하실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지. 그게 교사의 일이잖아."

 

 반대로 묻겠습니다.


 "현재 교사는 왜 지도를 하면 안 될까요?"


 현재 교사가 강하게 도하면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예전에 학교에서 자행되었던 폭력적인 모습, 학창 시절 학생들을 바르게 대하지 않았던 교사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학교에서 절대적 약자였던 학생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학교 문화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서서히 변화하던 이러한 학교 문화는 어느 순간 서로 간 존중과 배려를 넘어 명령과 고소 등의 횡포와 갑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해당 사건에 대한 외면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학생에게 올바른 것을 알려주기 위한 책임감이, 어쩌면 그냥 넘어가도 되는 잘못된 부분을 이야기하여 알려주려는 선의가 이러한 피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굳이 지도하는 것을 바랄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더 나은 사회와 미래를 위한 호의, 존중, 배려가 이렇게 변질되어 버린 것은 몇몇의 어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은 모두가 다 같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모두 다 똑같이 소중한 것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기본적인 것도 모를 수가 있는 거죠?"

 제레미아가 말했다.

 돌연 란테르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가장 소중하고, 그다음이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그리고 모르는 사람 순으로 소중합니다. "

 

 - 소설 데로드 앤드 데블랑 중에서 -


 사람마다 마음의 공간은 넓이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온 세상을 마음에 담고 사랑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 외에는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나와 내 가족만이 편안하게 누워 자리를 차지하기에도 벅차 그 외의 사람들은 마음 안에 자리할 공간이 없었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저는 우리에게 지금 내가 하던 생각과 말을 잠깐 멈추고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돈은 어느 날 갑자기 29원어치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29억 원어치 생길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요새 애들 이해 못 하겠다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요아이들이 나를 이해해서 맞춰 행동 수 있을까요? 많이 배우고 더 경험 많은 나도 못 하는 이해를 요새 애들에게 바라는 건 무리일 겁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해가 안 가는 것과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엄밀히 말해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다양한 선택지에서 나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며 동시에 마음에 안 든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공부가 부족하고 자신이 경험한 세상이 작은 탓에 다른 사람의 선택이 나의 기준에 맞지 않아 보여 싫다는 의미입니다.


 진정 제대로 안다면 세상에는 이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그 상황을, 그 사람을 제대로 모르기에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이해와는 별개인 개인의 선택 문제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부분이 많을 수록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친구는 공부를 해서 알아낸 것이 지구에 이쑤시개를 들고 콕 찍은 한 점 정도에 대한 이해였다고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풍요로운가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지식과 지혜는 어떠한 수준인가요? 상대방이 오랜만에 힘들게 펜을 잡는 게 아니라 자주 펜을 잡아 마음껏 쓸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나요? 가족들과 있을 때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는 있나요? 밥을 먹을 때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흐르지 않게 우리가 마음을 보듬어 줄 수는 있지 않을까요?


 아티스틱스위밍(처음에는 수중발레로 불렸지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으로 바뀌고 2017년 다시 명칭이 변경)에서 수중 발레리나의 수면 위 모습이 현재 학교라면 수면 아래 발버둥이 그 젊은 교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면 위의 남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겉모습을 위해 아래를 혹사시킨 우리 사회의 가난한 마음이 결국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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