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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Oct 22. 2023

우선, 철학이 뭔대요?

시작하기 전에

철학을 하면 마주하게 되는 몇 가지 골치 아픈 질문들이 있습니다. 철학과생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질문 들이죠. 첫째로는 “철학원 차리면은 이름 하나 공짜로 지어줄 수 있느냐?” 따위의 질문입니다. 농담 같겠지만 실제로 대학생 시절 숱하게 들어온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는 대충 ‘김갑돌’ 같은 이름 하나 지어주고 웃어넘기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혹시나 해서 진짜로 철학자가 철학원을 차리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을 위해 답하자면, 아닙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거 해서 밥 먹고 살겠냐는 질문입니다. 역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꽤 중요한 질문입니다. 친구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면 철학과의 이미지와 저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웃으며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고 답 했습니다만, 여기는 제가 마음껏 철학할 수 있는 공간 아닙니까? 그러니 제 방식대로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거 해서 밥 먹고 살겠냐?”라는 질문의 의미를 살펴보죠. 여기서 ‘그거’란 철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밥 먹고 살겠냐?’라는 건 우리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요소 중 하나인 식사를 유지할 수 있겠냐는 뜻이고, 그건 결국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경제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겠냐는 의미이죠. 위 질문을 정확한 의미로 바꿔보겠습니다.


“철학을 해서 최소한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는가?”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철학을 한다는 게 뭔지 알아야 그게 돈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알죠. 철학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이렇게 철학과생이 마주치는 골치 아픈 질문 세 번째가 나오는군요. 

“그래서 철학이 뭔데?” 

 이 질문도 정말 많이 들은 질문입니다. 위의 질문은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이 질문은 안됩니다. 여기서는 진지해져야 진정한 철학도라 할 수 있지요. 먼저 우리가 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때를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볼까요. 


1. 김갑돌 ceo의 경영철학은 훌륭하다.

2. 갑돌이는 문득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떠올렸다.

3. 갑돌이는 현재 철학과에서 과학철학을 공부 중이다.


대충 이 정도가 떠오르는군요. 더 많은 예시를 들 수 있겠지만 모두 이 세 문장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이 세 문장에서 사용되는 철학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략 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1번부터 볼까요.


1. 김갑돌 ceo의 경영철학은 훌륭하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가장 쉽고 평범한 방식입니다. 여기서 쓰이는 ‘경영철학’에서 ‘경영’을 빼고 무얼 넣어도 가능합니다. 육아철학이라든지, 운동철학이라든지, 프로그래머로서의 철학, 노년에 대한 철학, 뮤지션으로서의 철학 등등. 사실상 무한하게 갔다 붙일 수 있죠. 당장 떠오르는 아무 단어나 가져다 붙여볼까요. 충전기가 눈앞에 있군요. ‘충전철학’. 놀랍게도 말이 됩니다. 저는 가능한 상황에서는 무조건 전자기기를 충전시킨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하죠?

이러한 방식으로 쓰는 철학은 지혜, 지식, 생각 등 ‘삶을 살아가면서 얻은 도움이 되는 무형적인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학은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김갑돌ceo의 경영철학을 들어보는 건 삶에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죠. 어머니의 육아철학을 듣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의 철학을 듣는 것도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은 사실로서의 합의는 불가능합니다. 삶을 이루는 요소는 수백 수천 가지이고, 삶의 형태 또한 수천수만 가지입니다. 사실상 그것들 모두에 철학을 가져다 붙일 수 있죠. 모두 개별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철학들이 모두 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김갑돌ceo의 경영철학은 의미 있고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 철학이 경영에 대한 하나의 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2번으로 넘어가 볼까요.


2. 갑돌이는 문득 자유의지란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떠올렸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정의란 무엇일까?’ 등등.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질문을 한 번은 맞이합니다. 보통 ‘쓸데없는 질문’ 혹은 ‘철학적 질문’이라고 하죠. 철학적 질문이란 뭘까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철학적 질문과 철학적이 않은 질문의 경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질문이 철학적이고 어떤 질문이 철학적이지 않을까요. 

갑돌이가 문득 질문을 떠올립니다. 

‘오늘 점심으로 돈가스가 좋을까 제육볶음이 좋을까’  

이 질문은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본능적인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건 철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이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죠. 그러나 오늘따라 갑돌이가 고민이 많은지 질문을 이어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돈가스, 엊그제는 제육볶음을 먹었구나. 나는 왜 늘 제육볶음과 돈가스만 먹는 거지?’

돈가스와 제육볶음을 고르는 질문에 비하면 상당히 골치 아픈 질문입니다. 무언가 생각할 거리도 많고요, 나름대로 답을 해보아도 아리송해지죠. 그렇지만 여전히 철학적인 질문은 아닙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죠. 오늘따라 갑돌이가 배는 별로 안 고프고 질문이 고픈가 봅니다.

 ‘늘 제육볶음 아니면 돈가스만을 먹는 걸 보니 나의 생각과 선택에는 큰 제한이 있구나. 나는 점심메뉴 하나 자유롭게 고르지 못하는 사람인가? 어쩌면 나는 오직 돈가스와 제육볶음만 평생 먹게 설계된 게 아닐까? 나에게 점심메뉴를 고를 자유의지가 있을까?’

이건 누가 들어도 철학적 질문입니다. 다른 학문을 통해 답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들으면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나 싶으면서 화가 날 수도 있죠. 


- 궁극의 세 가지 질문

저는 철학적 질문이 어떤 건지 알기 위해 질문에 질문에 질문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나아간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철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에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답하기 곤란해지는 질문까지 이어집니다. 질문은 두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아가거나.

 방금 갑돌이가 한 질문이 안으로 들어가는 방향의 질문입니다. 제육볶음과 돈가스만 먹는 자신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안은 물리적인 안이 아닙니다. 심장은 어떻게 뛰고 근육은 어떻게 움직이고 세포가 어떻고 atp에너지가 어떻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물론 그러한 질문도 꽤나 인간 내부 깊숙이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철학은 그것보다 더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러다 보면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는 곳까지 가게 됩니다. 거기서 만나는 궁극의 질문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갑돌이가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번엔 질문의 방향이 안이 아닌 밖을 향하죠.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돈가스와 제육볶음만 먹을까. 돈가스와 제육볶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지? 어쩌면 두 음식은 본질적으로 같은 음식인 게 아닐까?” 

갑돌이가 자신이 아닌 돈가스와 제육볶음에 대해 궁금해하는군요. 돈가스와 제육볶음은 우리의 밖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곳이요. 그 모든 것을 ‘사물’이라고 하고 사물이 있는 곳을 ‘세계’라고 합니다. 사물에 대한 질문은 곧 세계에 대한 질문이죠. 철학이 궁금한 건 물리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돈가스의 재료가 어떻고, 제육볶음의 영양성분이 어떻고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돈가스와 제육의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죠. 그렇게 물리적인 세계 너머로 나아가다 보면 만나는 궁극적인 질문이 “세계란 무엇인가.”입니다.

갑돌이는 고민 끝에 돈가스를 먹으러 가기로 합니다.  단골 돈가스 집에 간 갑돌이는 바삭한 돈가스 한 점에 행복해합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돈가스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또 한 번의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는 돈가스 한 점에 이렇게 행복해지는구나. 도대체 나는 왜 돈가스를 먹고 행복해하지? 돈가스의 맛이란 무엇이기에 나의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걸까? 나에게 돈가스란 뭐지. 돈가스는 나에게 어떻게 드러나는 거지.”

나는 누구인가. 또 세계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에 빠지다 보면 질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 나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세계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나 없이는 세계도 있을 수 없죠. 나에 대한 답을 찾고, 세계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반드시 둘 사이의 관계도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나와 세계보다도 훨씬 중요한 궁금증일 수 있죠.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철학적 질문이란 세 가지의 방식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나와 세계는 어떤 관계인가. 철학이 관심 있는 건 이 세 가지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영역에 대한게 아닙니다. 현실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관심이 있죠.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네요.

“철학적 질문이란 나와 세계,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 대한 현실 너머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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