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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Oct 22. 2023

이 책에 대하여

시작하기 전에

제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개념을 가지고 하는 저글링이 재밌어서입니다. 과학으로도 해보고 사회과학이나 역사로도 개념을 가지고 놀아봤지만 역시 제일 재밌는 건 철학입니다. 철학이 하는 저글링이 제일 쓸데없고 현실과 동떨어져있거든요. 철학에 비하면 과학이나 사회과학, 역사는 현실적이고 유익하죠. 철학은 쓸데없이 커다란 개념들을 자기 멋대로 저글링 합니다. 저는 그걸 구경하고 같이 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있어 철학은 최고로 재밌는 취미입니다.

요즘엔 점점 교양으로서 학문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학이나 역사, 경제 같은 거요. 특히 과학은 뛰어난 학자들과 커뮤니케이터들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데에 성공하면서 접근성이 정말 좋아졌습니다. 과학 베스트셀러는 언제나 성공적으로 팔리고 있고 유튜브에서 과학 교수님들의 대화가 백만 조회수를 넘는 시대예요. 취미로서 과학을 즐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저는 과학만큼이나 재밌는 취미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철학적 질문을 통해 개념을 저글링 하며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즐길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 과정 속에서 나오는 논리 정연함이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지. 또 얼마나 치밀하고 치열한지. 그 쓸데없는 저글링으로 나와 세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거 정말 재밌고 지적이거든요.

 누군가는 이런 방식의 철학을 말장난이라고 합니다.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철학이라고도 하지요. 네. 말장난 맞습니다. 의미 없고 공허하다는 말도 동의합니다. 미리 말해두겠습니다만, 개념을 저글링 한다는 건 문제 삼지 않아도 될 것들을 문제 삼는다는 뜻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들을 가지고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질 거예요. 그건 남들이 봤을 때 몹시 피곤하게 보일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취미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사실 다 장난 비슷한 거죠. 특히  무언가를 만들고 창작하고 찾아가는 능동적인 취미일수록요. 그림 그리기는 사실 붓장난 물감 장난이잖아요. 캠핑은 소꿉장난 비슷하고요. 화가도 아니면서 화가 흉내를 내고, 집이 있으면서 집 없는 사람처럼 돌아다니죠. 다들 안 하면 안 귀찮고 안 피곤한 것들을 굳이 찾아서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걸 ‘취미’라고 하기로 했다고요. 

저는 철학도 그림 그리기나 캠핑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건 개념으로 하는 말장난이에요. 세상에 당연하게 있어 보이는 개념들을 가지고 마음껏 놀아보는 겁니다. 의미 없고 공허한 말장난이면 어떻습니까. 이건 꽤나 재밌는 일이라고요.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할 철학은 대충 이런 방식입니다. 개념을 돌려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쪼개도 보고 다른 개념과 비교도 해볼 겁니다.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어디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나 해 볼 거예요. 세상에 원래 있던 것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건 그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을 파고들 겁니다. 또한 세상에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따위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의심하며 명확하게 규명해 나갈 거예요. 그게 바로 철학이 개념을 저글링 하는 방식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건 있습니다. 누가 “취미가 뭔가요?” 하고 물었을 때, “제 취미는 철학이에요. 개념을 저글링 하죠.”라고 하기엔 조금 쑥스럽고 민망하긴 합니다. 아마 실제로 그렇게 말한다면 “아… 예…. 어려운 거 하시네요. 멋져요.”하고 오랜 시간 침묵이 이어질 거예요. 남들에게 철학 공부한다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게 쉬웠던 세상은 아마 고대 그리스 이후론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불만입니다. 진짜 재밌는 건데 왜 부끄러운 게 되어 버렸을까. 저는 지금까지의 철학이 신화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우리 삶을 바꾸어줄 거라는 신화. 철학이 궁극의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줄 거라는 신화요. 저는 그 신화를 조금이나마 벗겨내고 싶습니다. 그다지 거창하지 않은, 재밌으려고 하는 철학도 있다는 걸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지혜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취미로 철학할 수도 있는걸요.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해보겠습니다. 잊고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모두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거 해서 밥 먹고 살 수 있겠냐?”


당연히 없죠. 취미로 하는 건데 먹고살 수 있을 리가 있나요. 그러나 철학은 저의 제일 재밌고 사랑스러운 취미입니다. 재밌는 거 하면서 밥 먹고 사는 게 우리 모두의 꿈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이 책이 잘 되어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취미가 직업이 되는 건 짜릿한 일이니까요.


- 이 책에서 다루는 것

이 책은 취미로 철학을 시작하기 위한 튜토리얼 책입니다. 계속해서 재밌다고는 하지만 사실 철학이라는 게 쉬운 건 아닙니다. 준비운동도 없이 어려운 개념을 무턱대고 저글링 했다간 다치기 십상이죠. 그래서 튜토리얼이 필요해요.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뉩니다. 책의 전반부는 철학 들에 대해서 다룹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두 가지를 골랐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입니다. 철학의 양대산맥과 같은 존재론과 인식론은 누가 뭐래도 철학의 핵심입니다. 이 두 가지 철학이 가장 크고 모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념을 저글링 하거든요. 그렇기에 존재론과 인식론에 대한 내용을 모른 채 철학을 공부한다면 하는 내내 철학이 무얼 하는 건지조차 모른 채 끝날수 있습니다. 크고 어려운걸 먼저 하면 작고 쉬운 건 알아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존재론의 핵심적인 철학적 질문은 이러합니다. “있다는 건 무엇인가.” 즉, 존재론이 저글링 하는 개념은 “있음”입니다. 와, 크죠? 이 정도는 저글링 해야 철학이라 할 수 있죠. 존재론 파트에서 우리는 “있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놀아볼 겁니다.

인식론의 핵심적인 철학적 질문은 “안다는 건 무엇인가.”입니다. 즉, 인식론에서 가지고 놀 개념은 “앎”입니다. “있음”도 어이가 없는데 “앎”도 만만치 않죠? 이거 상당히 재밌습니다. 인식론 파트에서 우리는 “앎”을 가지고 저글링 해보겠습니다. 

대략 철학에서 하는 저글링이 뭔지 보았다면 위대한 철학자들의 저글링을 구경하고 해 볼 차례입니다. 후반부는 철학사 전체를 개괄적으로 다룹니다. 그야말로 저글링의 달인들이 줄줄이 나올 거예요. “있음”과 “앎”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무수한 개념들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저글링 되는지를 보게 되실 겁니다. 

철학사 부분은 이렇게 나뉩니다. 고대철학, 중세철학, 근대철학, 현대의 문, 그리고 현대철학까지. 최대한 맥락을 살려서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정리했습니다. 동시에 그 시대의 철학자들이 실제로 어떤 철학을 했는지, 어떤 개념을 저글링 했고 어떤 개념이 발견되었는지 실제적인 내용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것

이제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걸 말해보겠습니다. 첫째. 이 책에서 동양철학은 다루지 않습니다. 그건 동양철학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가 동양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동양철학도 깊이 있게 파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서양철학이 좀 더 재밌습니다. 

둘째. 이 책에선 과학철학, 심리철학, 언어철학, 정치철학 등, 개별의 철학적 질문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는 이른바 응용철학에 대해서 다루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진짜 재밌는 철학인데요.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인식론과 존재론을 깊이 있게 말하는 게 더 중요하고 재밌겠다 판단했습니다. 점점 인식론과 존재론을 경시한 채 응용철학만 하려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마음도 조금 섞여있습니다.

셋째. 이 책에서는 윤리학에 대해 다루지 않습니다. “올바름”, “정의”라는 개념을 저글링 하는 윤리학은 존재론과 인식론만큼이나 철학에서 중요한 분과입니다. 또한 존재론과 인식론이 쓸데없어 보이는 것과 달리 윤리학은 우리 삶과 아주 밀접해있죠.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철학은 오직 윤리학뿐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책에서 윤리학을 다루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취미로서의 철학을 위한 책입니다. 윤리학은 우리 삶과 너무 밀접해있기 때문에 즐기면서 저글링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불어 윤리학 또한 존재론과 인식론이 밑받침되어야 저글링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들의 엄밀한 정의에 대해 다루지 않습니다. 이 책은 철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저의 목표는 앞으로 여러분이 철학을 즐길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겁니다. 철학이 하는 일이란 이런 거구나, 철학자들이 대충 이런 철학을 했구나를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게 이 책의 역할입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철학에 대해서 대충 다 알겠다!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책은 철학을 시작하기 위한 책이지 끝내기 위한 책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틀린 내용을 두루뭉술하게 쓰진 않았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의 엄밀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책이 철학을 시작하는데 좋은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저글링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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