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추진
모니터의 하얀 화면 위로 검은 글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서윤은 깜빡이는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라는 부장의 메일은 벌써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엉킨 실타래 앞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또다시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
“서윤 씨, 그거 오늘까지는 넘겨줘야 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애써 태연한 척 “네, 팀장님”이라고 대답했지만,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간신히 파일을 전송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의 기운이 방전된 배터리처럼 바닥나 있었다.
텅 빈 사무실을 나서 차가운 밤공기를 맞서는 순간, 문득 귓가에 물의 일렁임이 느껴지는 듯했다.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오직 물소리만 남았던 10초의 우주.
나를 짓누르던 모든 무게가 사라지고, 물이 나를 가만히 안아주던 그 생경하고도 평화로운 감각을.
그 이끌림에, 서윤의 발걸음은 어느새 수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번째 강습 날, 수영장의 공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사무실의 건조하고 탁한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하고 촉촉한 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레인 끝에 서자, 김영훈 강사가 서윤을 발견하고는 눈을 찡긋하며 고갯짓을 했다.
‘연습 나온 거 다 봤어요’ 하고 말하는 듯한, 그만의 격려 방식이었다.
“자, 회원님들! 지난 시간에 몸에 힘 빼고 뜨는 연습, 충분히 하셨죠? 오늘은 그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해볼 겁니다!”
강사의 설명은 간단했다.
벽을 발로 힘껏 밀고, 양팔을 앞으로 쭉 뻗은 채 몸이 물에 뜨는 감각을 유지하며 미끄러져 나가는 것.
마치 물 위 수퍼맨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은 쉬웠지만, 발이 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찾아오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첫 시도에 서윤의 몸은 맥없이 방향을 잃고 가라앉았다.
역시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괜찮아, 힘 빼는 거부터.’
서윤은 자유 수영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10초의 우주.
그 고요함 속에서 나를 받쳐주던 물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시 한번 숨을 참고 벽을 밀었다.
이번엔 어떻게든 나아가겠다는 욕심 대신, 물 위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몸이 화살처럼 뻗어 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비록 2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멈춰 섰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물을 뚫고 나아간 첫 경험이었다.
다음은 킥판을 이용한 발차기 연습이었다.
“킥판은 여러분의 상체를 띄워줄 거예요. 하체에만 집중해서, 허벅지로 물을 가볍게 누른다는 느낌으로 차주세요! 하지만 킥판은 튜브처럼 지탱하는 힘은 없으니, 킥판을 너무 눌러서는 안 됩니다. 살짝 올려놓는다는 느낌으로 가볼게요."
물에 뜬 킥판을 눌러보니 쑥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마음은 한결 편했다.
서윤은 킥판을 붙잡고 힘차게 발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요란한 물보라뿐, 몸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에 맥이 빠졌다.
강사가 레인을 오가며 한 사람씩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서윤 회원님! 무릎 너무 접으면 안 돼요. 무릎은 펴고 발목에 힘 빼고, 발등으로 물을 채찍질하듯이 휙!”
강사의 조언에 따라 발목의 힘을 빼고 허벅지 전체를 움직여 물을 밀어냈다.
그러자 첨벙거리기만 하던 발차기가 어느새 부드러운 추진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킥판을 잡은 손끝으로 물살이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느렸지만, 분명히, 서윤은 자신의 두 다리로 물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서윤은 킥판에 의지해 25미터 레인을 처음으로 완주할 수 있었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허벅지는 뻐근했지만, 그 끝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은 달콤했다.
수업이 끝나고 무심코 상급반 레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할아버지가 유영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의 움직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몸짓 속에, 오늘 자신이 배웠던 그 작은 발차기가, 그리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그 감각이 모두 녹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아득히 먼 헤엄이었지만, 이제 그 유려한 몸짓 속에 오늘 내가 배웠던 작은 몸짓이 숨어 있음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