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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Mar 22. 2022

제사에 가지 않는 며느리

제사란 무엇인가

“저 장가갔고, 지금은 혜린이가 제 식구예요. 아버지 어머니 서운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식구 먼저 챙겨야겠어요. 제가 가장이니까요. 부모님 생신이나 집안 행사 같은 거 챙길게요. 다만, 자기 조상은 자기가 책임지자는 것이 저랑 혜린이의 합의된 생각이에요."
                                                                                  - 웹드라마 <며느라기> 중에서


나의 배우자가 이렇게 멋지게 부모님께 선언(?)하고 제사에 가지 말자고 했으면 연애할 때도 씌인 적이 없는 콩깍지(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갑자기 잘 생겨 보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ㅎㅎ)가 한 번에 장착되었을 텐데… 나의 배우자는 이렇게 멋진 말로 제사에 안 가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솔직했다.


- 아라: 마루(남편), 내가 통 못 본 것 같긴 한데, 서울 와서 생활하면서 제사 때마다 집에 내려갔었어, 혹시?

- 마루: 아니.

- 아라: 그럼 결혼했다고 갑자기 제사에 가진 않아도 되겠네? 안 하던 짓 하면 부모님 놀라셔. 안 가는 게 낫겠다.

- 마루: 그러든가.


사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는 것은 아닌데 결혼 직전인지 직후인지, 이런 내용의 대화를 농담 반, 진담 반 주고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신기할 만큼 전통적인 가부장의 권위의식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어떤 집은 며느리 들어오면 없던 제사도 만든다 하고, 어떤 남자는 본인 결혼 전에는 집안 제사에 신경도 쓰지 않다가 결혼 후 갑자기 제사에 개근상 타야 하는 효자로 돌변한다는데, 다행히 이런 며느리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의 주인공 이 되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각자 밤낮으로 일에 바빴다. 낮에도 하는 일이 있었고 밤에는 생계 유지를 위해 돈 벌러 다녔다. 제사에 갈 수가 없는 형편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주 싱겁게 제사에 가지 않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사 때마다 전화를 드렸고 제사비를 보냈지만 제사에 간 적은 없다. 이렇게 된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죄를 짓거나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부부 간의 합의와 결정에 따라 하면 될 일이다.


혹시 이 글을 발행하고 나면 나를, 그리고 한국사회의 제사에 가지 않는 며느리를 싸잡아 욕하는 댓글을 남기는 분이 계실까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는 나의 공간이니 그냥 이야기해 본다.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는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식이나 자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분을 진심으로 기억하고자 하고  분과 살아 생전 인연이 있던 분들이 모여  분을 추모하면 가장 본질에 맞는 날이  것이다. 그런데  제사에 가지 않는 며느리들을 욕하고 탓하는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을까?  의아한 일이다. 정작 제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나 의견은  적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본질은 며느리가 조상을 대하는 태도가 틀려서가 아니다. 만약 며느리가 조상을 대하는 태도가 틀렸다면 조상에 대한 태도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며느리가 아닌 시절의 여성들은 집안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욕 먹지 않았다. (집집마다 가풍은 다르지만 사회적 지탄의 대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나는 시간만 되면 부모님 따라 자주 제사에 참석했는데 제사에 오지 않은 사촌 자매형제들이 욕 먹는 건 보지 못했다. 다들 바쁜가 보구나, 하고 넘기셨다. 결혼 전의 남성들이 집안의 제사에 가지 않는 것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은 아닌 듯하다. 우리집 남자도 결혼 전 날짜 맞춰 제사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 정작 혈연 관계로 맺어진 이들, 돌아가신 그 분을 아는 이들은 제사에 가지 않는다고 욕 먹지 않는데 왜 며느리만? 태도나 도리가 왜 며느리에게만 적용되는지 참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제사에 가지 않는 '며느리'를 욕하는 것은 조상을 대하는 태도나 도리에 대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며느리'들이 욕 먹는 이유는 그냥 '며느리'이기 때문이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욕해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막 대해도 되는 하층 계급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권한은 하나도 없이 역할만 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시가의 제사 참석이나 노동력 제공 여부를 둘러싸고 며느리 욕 좀 그만 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상님 좀 그만 팔았으면 좋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몇 년 전 김혼비 작가의 칼럼이 나에게는 최고 명문이다.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너무 무례한 것 같다. 자기들은 스스로를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며 비교적 이해심 있는 인간형으로 상정하면서, 애먼 조상들은 자손들의 피곤한 일상이나 사정 따위 전혀 헤아릴 줄 모르고 그저 밥만 찾고 관심 받기만 바라는 소시오패스로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어떤 삶을 살아오고 어떤 인품을 지녔는지와 상관없이 죽어서 조상이 되는 순간, 애정결핍에, 밥 집착증에, 속 좁고 개념 없는 악귀나 괴력난신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이거 어디 억울하고 무서워서 마음 편히 죽을 수나 있겠나. 내가 조상이라면 밥을 못 얻어먹는 것보다, 그깟 밥 좀 안 차려준다고 후손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저주를 내릴 평균 이하 인격체로 취급당하는 것이 더 화가 나서 제사상을 다 엎어버리고 싶을 것 같은데 말이다.

(김혼비, <우리 조상님이 밥 안 준다고 저주하는 ‘소시오패스’일 리 없잖아>, 김혼비의 혼비백서(5), 경향신문, 2019.09.21., 원문 보기 링크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909202046005)


원래도 그렇게까지 생각지는 않았지만, 김혼비 작가의 칼럼을 읽고 우리 양가의 조상님들이 우리가 제사에 가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앞날을 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더불어 우리의 부모님들에 대해서도 믿음이 생겼다. 당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당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어떤 인물을 기리는 방법이 ‘오직’ ‘부모님이 생각하는 정해진 음식’이 올라간 상을 차리고’ ‘절하면 끝나는’ 제사 뿐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하고 옹졸한 분들은 아니라는 확신이다. 우리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돌아가신 분을 기려도 되지 않을까?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에서는 돌아가신 엄마를 기리기 위해 10년만에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하와이로 향하고 아주 특별한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83쪽.


또 곧 감동적이었던 영화 '코코'가 떠올랐다. 돌아가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산 자들에 의해 기억됨으로써 영원히 살아있기도 하다는 것.

 

살아있는 세계에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When there's no one left in the livign world who remembers you,
you disppear from this world.
                                                                                                         - 영화 <코코> 중에서


그러니 제사가 정말 그 의미를 새기고 돌아가신 이를 마음으로 기리는 자리였으면 좋겠다. 아이에게도 형식적인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끔 기억해 주면 된다고 얘기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메인 화면 사진 출처. 헤럴드경제, 김병진기자, 2022.1.29.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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