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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갚아야 할 때

빚진 삶 빚 갚는 삶

by 아라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 '삶'(주1)


얼마 전 새벽 독서 모임에서 한 작가님이 단 세 줄, 11글자로 된 황인숙 님의 짧은 시를 읽어 주었습니다. 조용히 읽어 주었는데 이 시가 머리를 쾅 내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곧 홍세화 선생님의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늘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이 덕분에 공동육아에 발을 들였다가 10년이나 동네에서 공동육아를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공동체 안에서, 마을 안에서 아이는 잘 자라 어느 새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공동육아 안에서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매일 나들이 다니며 햇빛과 바람, 눈과 비를 느꼈고 매일 매일 달라지는 온기와 습도를 머금은 공기를 맘껏 마셨습니다. 오가는 길에는 작은 꽃과 풀을 만지고 향을 맡았으며 곤충들과 흙의 생명체들과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학교처럼 나이가 같은 친구들뿐만 아니라 많은 형, 언니, 동생들과 어울리면서 막내로 시작해 동생 역할, 친구 역할, 언니이자 형의 역할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놀이와 활동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관심과 능력을 발견해 주었습니다. 엄마와는 다른 시선으로 봐 주는 많은 어른들이 안정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건강하고 안전한 공동체였습니다.


엄마인 저도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몰랐는데 어울리면서 다른 부모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이를 돌보기 어려울 때 품앗이로 서로 도우며 함께 키웠습니다. 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이를 보내며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어른인 저에게도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고 새로운 평생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연히 법인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는 기회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10년 동안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일터에서 신나게 일했습니다. 공동육아의 경험이 일터에서 쓰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던데 진짜였는지, 서울, 경기 곳곳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니며 공동육아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 행복했습니다. 올해는 무슨 복인지 ㅎㅎ 대전, 세종, 부산, 제주,,, 많이도 돌아다녔네요.


5년 동안이나 매달렸던 법안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하여 얼마 전 시행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아직은 어렵지만 현장 곳곳에서 이 법안에 의지하여 새롭게 힘을 내고 있습니다. 함께 할 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의욕이 솟아납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유아기 뿐만 아니라 초등기까지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할 정도입니다.


사실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이젠 일터를 떠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고민했었습니다. 그런데 법이 통과되었고 내내 준비를 해 왔으며 시행일이 되어 일의 본격적인 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작은 소명이 피어나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삶'이라는 시가 다가왔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졸업할 때까지 10년을 공동육아를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누렸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우연히 들어선 새로운 길에서 신나게 일했을 뿐만 아니라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공부도 실컷 했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사이에서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누리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놀기를 좋아하고 숙제는 하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난 그런 건 재미 없는데......'

그런데, 그런 저에게도 다른 마음도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나만 누려도 될까?'


그런데 이 시가 저에게 답안지를 내밀었습니다.

시인은, 삶은 외상값을 갚는 것이라고 말하네요. 홍세화 선생님은 늘 빚을 갚는 삶을 살라고 하네요. 얼마 전 제가 존경하는 분이 회의 중 느닷없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숙제 수행형 인간이라서요.' 그 말씀을 듣는데 가슴이 쿵 울렸습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나신 정신적 지주이신 선생님은 병에 걸린 것을 알고도 말씀하셨다 합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하게 살았다. 여한이 없다." 선생님은 아이가 없으십니다. 청년 시절, 봉제 공장이 즐비하던 창신동에서 부모 모두 공장에 나가고 방치되어 있던 아이들을 돌보셨지요. 그것을 시작으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 사는 행복을 누리셨지요.


이제는 제 마음도 이만큼 누렸으면 이제 외상값을 갚으라고 합니다.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제가 가진 것으로 갚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에게 빚졌으니 더 많은 아이들에게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모에게 빚졌으니 더 많은 부모들에게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육아를 누렸으니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도록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고 숙제를 하는 것이 행복한 삶. 그리 살아가려고,

눈을 뜨면 새롭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며 숙제합니다.

집을 나서며 길에서 마주친 이들의 복된 하루를 빌며 감사를 전합니다.

오늘도 출근해 오늘의 일을 그저 할 뿐입니다.

집에 돌아오면 기왕 할 숙제, 더 잘 하려고 책을 읽습니다.

그리 살면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겠지요?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진정한 의미에서 오직 선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방식을 따라 하라.

모든 행위에서 이것을 지켜라. (주2)



주1> 황인숙, "삶".

주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현대지성.

표지 이미지> Image by Harry Strauss from Pixabay.




오늘도 글에 머물러 주신 모든 글벗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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