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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단다 2

엄마의 20대, 독립에 대하여

by 아라

(앞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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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때 16살이었어.

큰 상처를 받았지. 울고불고 할아버지께 대들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어.

아빠가 말씀하신 조건들 다 통과하고 왔는데 왜 안 되냐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어떻게 어른이 아이와 한 약속을 이렇게 쉽게 저버리냐고, 어떻게 내 꿈을 짓밟는 사람이 나를 낳고 키운 아빠일 수 있냐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어.

“그런 건 공부로 안 되는 애들이 하는 거야.

넌 공부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음악 같은 건 그냥 취미로 하면 되는 거야.

대학에 가도 계속 음악이 생각나고 하고 싶다면,

그땐 유학을 보내 주마.”


안 돼요, 아빠!!!!!

아빠, 제발요, 제발요!!!!!


엄마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엄마는 어렸고 아무런 힘도 없었지.


엄마는 절망과 좌절에 빠졌어.

그 절망과 좌절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라

밤마다 이불 속에서 울었어. 그러다가 우연히 운명처럼 ‘데미안’이라는 책을 만났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주1)


엄마는 그때, 스스로

엄마를 둘러싼 알을 깨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결국 엄마가 향해야 할 곳이

엄마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그때가 똑똑히 기억난다.


16살의 춥고 긴 겨울.

울다가 울다가 눈물이 마를 때쯤,

부모에게, 가족에게 갇히지 않고

나의 세상으로 갈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어.

지금의 고통이 나의 밑거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어릴 때 이런 좌절을 겪었으니

커서 지금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조금씩 생겼어.

너무 비장하지? ㅎㅎ


그 암울했던 겨울을 지나 봄이 왔을 때,

그렇게 책과 보낸 시간, 홀로 보낸 시간을 통해 힘을 얻고, 그 힘으로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어.


너무 싱겁니? ㅎㅎ

고등학교 때 공부를 내던지고 가출하고...

막 그랬어야 앞뒤가 맞는 스토리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순진했는지,

포기를 한 건지, 포기를 못한 건지,

회복력이 좋았던 건지. 풋.


엄마도 그 때의 엄마를 잘 모르겠네.

부모님께는 대학에 가면

난 진짜 유학 갈 거라고 했어.

그때 가서 딴소리 하시면 안 된다고. ㅎㅎㅎ




배정받은 미션스쿨 고등학교의 입학식 날.

공연을 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

엄마가 가야 할 곳을 발견한 거야!

합창단!


그 학교에는 2학년 때 1년간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는 유명한 합창단이 있었어. 거길 들어가면 엄마의 음악 인생(?)이 달라질 것 같았어.


그 합창단에 들어가야겠다 마음 먹고,

모집 기간도 아닌데 무작정 음악실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게 해 달라고 졸랐어. 그런데 내쫓지 않으시는 거야.


잠시 후 음악실에 딸린 좁디좁은 교무실에

선생님들이 모였고

그 작은 방에 세 분이 둥글게 앉더니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하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본능적으로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란 걸 알았지.


엄마는 그렇게 특별한 합창단의 일원이 되었어.

고등학교 2학년, 1년 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과 우정으로 가득한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논산훈련소에도 가 보고, 교도소에도 가 보고,

노래하고 춤추고 플루트 연주하며, 전국을 누볐어.


우리의 진신과 순수함을 담은 노래를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는 것은

엄마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었어.

몰입과 성장의 시간이었어.

잊지 못할 경험과 진한 우정 속에서 상처가 많이 아물었어.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한 복수는,,,

우습게도 할아버지가 나온 명문대에 가지 않은 거야.

유학을 가기에 좋아 보이는 다른 대학을 선택했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ㅎㅎ)


네가 알다시피 엄마는 대학에 가서 음악으로 유학을 가지 않았어. ㅎㅎㅎ

대학은 또 한 번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커다란 시기였어. 대학에 가서 더 큰 세상을 배웠지.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생각도 많이 달라졌어.

가끔 식탁에서 의견 대립도 있었지만 이미 스무 살이 넘었는 걸. ㅎㅎ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마의 생각을 바꿀 순 없었어.

엄마를 가둬둘 수도 없었어.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속 많이 썩으셨을 거야.

할아버지는 하고 싶은 음악을 안 시켜 줬더니

애가 삐뚤어져 저런다고도 하셨지.


하지만 아이는 부모가 정해준 길로 가는 게 아니더라고. 부모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더더욱 아니더라고.

엄마는 그랬어.




법륜 스님이 그러시더라.

부모라 하더라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고. 그건 그 분 요구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그게 자꾸 뒤섞이게 되면 자기 인생의 진로가 안 생기죠. 부처님이 출가하실 때 엄마가 울고불고 반대했다고 하면 부처가 못 됐을 거예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러 갈 때 엄마한테 얘기했으면 반대했을 거 아니에요? 스무 살 넘어 부모님 말 너무 듣는 사람 중에 인생 제대로 피는 사람 없어요."


"부모가 늘 자식을 염려하는데

그건 그거대로 고맙게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나 내 갈 길은 내 갈 길대로 가야 해요."


당시 엄마가 이런 얘기는 몰랐지만,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

더 이상 부모 뜻에 따라 살 수 없다는 걸.

27살에 집을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시기에 집을 떠나 있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많은 편지를 썼어.


하고 싶은 공부 안 시켜줘서 삐뚤어진 거 아니라고. ㅎㅎ

그동안 저 키워 주시느라 애 많이 쓰셨다고.

이렇게 건강하고 당당하게 키워 주셔서,

스스로 자기 인생 살아갈 수 있게 강하게 길러 주셔서 고맙다고.

저 같은 딸 있으니 두 분 인생 성공하신 거라고. ㅎㅎㅎ 이제 제 걱정은 마시라고. 이제 저는 저의 갈 길을 갈 테니 그냥 지켜봐 달라고.

우리, 좋은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그렇게 완전히 독립했어.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독립을 한 거지, 인연 끊고 나온 건 아니야. ㅎㅎ

그 이후 결혼 전에 잠시 집에 들어가 살기도 했는데

그땐 이미 관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

그 후 결혼을 하고 너를 낳고 점점 사이가 좋아지더라.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 생각들은 그 자체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또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까.


엄마가 부모로부터 독립한 이야기. 참 길었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늘 말씀하셨어.

너도 크면 달라질 거고 너도 크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너의 그 생각은 어려서 그런 거라고.


그런데 엄마는 더 커서도 부모와 똑같은 생각으로 바뀌지 않았어. 나이가 같아진다고 생각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었어.


엄마는 엄마, 너는 너. 엄마의 말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엄마가 살아온 인생, 이거 하나밖엔 살아보지 않았단다.단 하나의 인생 경험 뿐이야.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 삼아

엄마의 소중한 아이를 좌지우지하면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단다.


엄마의 선택이 아니라 너의 선택을 하면 된다.

타인의 결정이 아니라 네 스스로의 결정을 따라 가면 된다.

너는 네가 느끼고 생각하고 감각한 것들을 믿어도 된다.

무엇보다도 너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네 안에 숨어 있는

여신의 존재를 자기 안에서 찾아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 사는(주2)

기쁨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너는 미래에서 엄마에게 온 손님이니까.

이젠 엄마가 너의 뒤를 따라가야 할 거야.

그래서 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단다.

설령 부모라 해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너는 그렇게 소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란다.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갈구하는 생명의 아들이자 생명의 딸입니다.

아이들은 그대들을 거쳐서 왔으나 그대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비록 그대들과 함께 지낸다 하여도 그대들의 소유물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그대들의 사랑을 주되 그대들의 생각까지 주지는 마십시오.

아이들 스스로도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몸이 머물 집을 주되 영혼이 머물 집은 주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꿈에서라도 감히 찾을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닮아 가려 애쓰되 아이들에게 그대들을 닮으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삶이란 뒤로 돌아가는 것도, 어제와 함께 머무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3)


주1> 헤르만 헤세, 《데미안》.

주2> 현경, 《미래에서 온 편지》, 열림원.

주3> 지은이 칼릴 지브란, 옮긴이 유정란, 《예언자》, 더클래식.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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