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고백
아이야.
이제 네가 스무 살이 되었잖아.
혹시 갖고 싶은 것이 있니?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니?
엄마는 말이야.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힘'을 갖고 싶었어.
'힘'이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았어.
힘이 있으면 아버지를 이기고 엄마의 꿈을 따라 엄마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힘이 있으면 남자를 이기고 여자인 엄마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힘이 있으면 가부장제를 뒤집어 엎을 수 있을 것 같았어.
힘이 있으면 부정의한 세상을 바꿔 버릴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엄마는 힘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했지.
먼저 목소리에 힘을 주었어.
어릴 때 아버지 친구 중 한 분이 "쟤는 노래시켜야겠다?" 하고
아버지께 말씀하신 걸 내내 기억하고 있었거든.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목청이 좋다고,
쟤 목소리는 멀리서도 또렷하게 들린다고.
너랑 아빠가 엄마 목소리 큰 것을 종종 창피해 하잖아.
그 때의 그 버릇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나 봐.
힘은 갖고 싶은데 키도 작고 체격도 작으니 어쩌겠니.
그래서 늘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나 봐.
엄마는 대학교 때 여자가 10퍼센트 밖에 없는 학과에 다녔어.
그렇게 남학생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사회에서 엄마보다 더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하는 모든 것을 엄마도 하기 시작했어.
남사친들과 함께 당구장에 다녔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어.
아마 그런 것에 스스럼이 없었던 건,
힘을 갖고 싶었기 때문일 거야.
대학교 3-4학년쯤 되면 이제 후배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거든.
어딜 데리고 다니냐 하면 데모하는 데 다니는 거야.
아빠가 엄마 후배였던 거 알지?
아빠 같은 남자 후배들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가는 거야.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으면
전경들은 데모하러 나온 남학생들에게 함부로 하거든.
방패로 밀기도 하고 손에 든 곤봉으로 때리기도 하지.
그러면 엄마가 앞에 나서는 거야.
내 후배들 때리지 말라고,
사람에게 함부로 폭력 휘두르지 말라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일부러 욕을 하는 거야.
엄마가 전경들 앞으로 막 나서는 거야.
전경이라도 엄마 같이 작은 여학생을 함부로 때리진 못하니까.
(그 시절이 지나고 많이 후회가 되었어.
사실 전경들이 무슨 잘못이 있니.
시키니까 나온 것 뿐이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닌데,
엄마가 참 잘못했다.)
아이야.
엄마는 그렇게나 힘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나 겁대가리가 없이 행동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엄마는 강해지고 싶어 쌈닭처럼 굴었어.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30대가 되어 결혼을 했어.
그런데 너를 뱃 속에 품고 나니까
더 이상 사람들에게 사납게 굴기 싫더라고.
그런 엄마 모습이 너무 싫더라고.
엄마를 바꿔야겠다,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어.
너를 낳기 한 달 전쯤이었나?
엄마에게 작은 사건이 일어났어.
밤늦은 시간에 퇴근하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이게 왠 일.
엄마 회사와 같은 건물 1층에 위치한 은행 로고가 새겨진
은행 공무 차량이 엄마의 차를 떡하니 막고 있는 거야.
전화를 해 차를 빼 달라고 하려니 전화 번호도 남겨져 있지 않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아 차가 밀리지도 않는 거야.
당시에 직장과 집은 꽤 멀어서 다른 도로 넘어가야 하고 차편이 마땅하지 않았거든.
하는 수없이 남산 만한 배를 안고 한여름에 게다가 종일 일하고 오밤중에,
여러 차례 차를 갈아타고 오래 걸려서 겨우 귀가를 할 수 있었어.
다음 날 출근해서 전날의 분노를 다시 장착하고
은행으로 찾아갔어.
처음에는 곱게 이야기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으려 했는데
그 은행 차량이 분명함에도 아무도 책임지려 하는 사람이 없고,
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거야.
엄마는 그 순간 너무 화가 났어.
"아무도 이 부분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겁니까?
그러면 지점장님 나오라고 하세요!"
그런데 정말 지점장이 나왔어.
지점장은 조용한 지점장실로 엄마를 데려 갔어.
앉자마자 죄송하게 되었다고 사과를 하고
무엇을 원하십니까, 물어보는데,
그런데 거기서 엄마가 말문이 턱 막히는 거야.
보상을 받으려고 간 게 아니었거든.
그런데 핵심 질문 "무엇을 원하십니까?" 물어보는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딱 얘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가 뭐라 그랬는지 아니?
"사과하세욧!"
큽. 벌써 사과 다 했는데,,,, 뭐래니,,,,,
그렇지. 사과 받으러 간 게 맞아.
근데 그렇게 차분하게 앉아서
엄마 얘기를 듣고 "무엇을 원하십니까?" 묻는데,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거야.
불타올랐던 전의가 상실되는 거야.
그렇게 하고 지점장실을 나오는데,
엄마는 본능적으로 알았어.
"아, 졌다. 내가 졌다..............................."
엄마 목소리가 더 컸는데 엄마가 졌어.
엄마가 잘못한 사건이 아니었는데 엄마가 졌어.
엄마가 가진 건 진짜 힘이 아니었나 봐.
엄마가 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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