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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단다 1

엄마의 10대, 꿈과 좌절에 대하여

by 아라

몇 년 동안 공들여 해오던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글자 그대로 낙담에 빠졌다. 내 안에 더 이상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략) 아무도 없었다. 외롭고 우울했다. 그렇게 실의에 찬 날들을 보내다가 코치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밤이 가장 어두워지면, 곧 새로운 날이 밝는 법이지..."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나는 마음에 평화와 위안이 밝은 빛처럼 밀려들고 있음을 느꼈다.

(중략)

"내게도 정말 어두운 밤이 있었지. 그때 내게 빛을 선물한 것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신비한 힘이 있지. 새로운 날을 맞으려면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해.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고 새 날을 얻은 사람은 없어. 어떻게 어두운 밤을 지나왔는지 서로에게 털어놓으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법이지." (주1)


아이야.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다가,

너에게 엄마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어졌어.


엄마의 10대. 꿈꾸고 좌절했던 이야기. 그리고 그 터널을 지나온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


네가 알다시피 엄마는 할아버지의 큰딸, 장녀야. 조금 더 수식어를 붙여 볼께. 아마 ‘할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매우 촉망받는 장녀였을 거야.

엄마는 운이 좋게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똑똑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 같아. 특별히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 했어. 애교도 없고, 눈치가 빠른 것도 아닌데 머리라도 좋아 정말 다행이었어. 할아버지는 엄마가 커서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면 좋겠단 얘기도 많이 하셨지. 아마 할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이었던 것도 같아. 하지만 뭐, 어릴 때니까 엄마가 그걸 진지하게 듣진 않았어.


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때 혼자 외국 생활을 많이 하셨어. 여러 나라에서 주재원으로 일하셨는데 할머니와 남매는 두고 갔지. 할아버지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엄마와 삼촌이 흥미로워할 만한 것들을 가지고 귀국하셨어. 유럽 각국의 신화 이야기가 담긴 괴물 같이 생긴 인형을 사다 주시기도 하고(엄마 책장의 트롤 인형, 그러고 보니 지금도 갖고 있네.), 생전 처음 보는 과학실험 도구를 사다 주시기도 했고.


엄마는 할아버지가 사다 주신 처음 보는 진기한 것들을 만져 보고 다뤄 보고 불어 보고... 하면서 호기심을 한껏 충족시킬 수 있었어. 피아노 치는 것도 좋아하고 악기 갖다 주면 아무거나 금방 다루는 걸 보시고는, 중학교 들어갈 때쯤이었나, 플루트를 들고 귀국하셨어. 이건 소리를 내기도 어렵더라고.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고 그걸 배워 보게 되었어.


근데 너무 재밌는 거야. 집에 오면 숙제만 해 놓고는 몇 시간이고 악보를 열어 놓고 연습을 했지. 좋아했으니 아마 실력도 금방 늘었겠지. 그렇게 2년쯤 배웠나. 언젠가부터 이걸 전공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예고 입시를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어.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어. 할아버지가 난리가 난 거야.

- 우리 집은 다 공부 잘 해서 그걸로 성공한 집안이다. 공부 잘 하는데 왜 음악을 하겠다고 하느냐.

- 음악가가 되는 길이 얼마나 좁은지 아느냐. 취미로 하라고 사다 준 거지 누가 그걸 전공하라고 했느냐.


엄마는 엄마의 생각을 이야기했어.

- 좁은 길이면 어때요? 저는 이게 공부보다 좋은데! 내가 행복하다는데... 아빠, 좋은 걸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잖아요!


몇 날 며칠 할아버지께 제발 공부시켜 달라고 매달렸지.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많이 애를 쓰셨더라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허락하시지 않았어. 대신 조건을 내걸었지.

- 정 그렇다면 조건을 걸겠다.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아 와라.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봐야겠다. 그러면 그 때는 진지하게 한 번 고려해 보겠다.


엄마는 할머니와, 그리고 엄마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과 함께 작전에 돌입했어. 입시 전에 있는 콩쿠르 일정을 찾아 등록하고, 경연곡을 확인하고 반주자를 구하고. 그리고 연습에 돌입했지.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했을지 상상이 가니? 연습실 같은 건 없었어. 그냥 방에서 보면대 세워 놓고 주구장창 연습하는 거야. 녹음해서 들어 보고. 연습 전에 복근 운동 열심히 하고. 그렇게 해서 엄마는 중3 때 콩쿠르에 나갔고 거기에서 1등을 했어. 할아버지가 건 조건을 한 번에 통과한 거야! 너무 기뻐서 할머니와 펄쩍 뛰었지.

“됐다, 이제 됐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바꾸시는 거야. 이번엔 두 번째 조건을 거시더구나. 할아버지가 보기엔 공부에 재능이 있지, 음악에 재능이 없다며, 유명 연주자 선생님에게 가서 재능이 있다는 확인을 받고 오라는 거야. 엄마는 할머니와 떨면서 그 분을 뵈었고, 그 분은 다행히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일반적인(?) 답변을 주셨지. 그리고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고. 그땐 무지 떨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라. 어느 선생님이 생전 처음 보는 학생의 앞길을 막을 수 있을까.


엄마는 할아버지가 내건 모든 조건을 통과했어. 그리고 할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렸지.

떨면서, 하지만 간절하게 할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나는 그런 공부 시켜줄 돈은 없다.”


(다음 편에 계속)


주1> 보도 섀퍼, <멘탈의 연금술>

표지 이미지> ai-generated-8676961_1280 from pixabay.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새로운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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