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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아라 Nov 06. 2021

육십 육 번째 아침

2021.11.6 훌륭한 유부초밥

초 여름부터 시작한 아침 산책이 66일 그리고 샘 하지 못한 몇 날이 지났다.

아침 산책을 함께 해 준 지연과 나는 서로의 상태를 살피며 함께 하기도, 따로 걷기도 했다.

여름의 열기가 여전했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 기운이 돌던 새 파란 때에 시작해

이제는 온통 불난 듯 울긋불긋한 초겨울의 낙엽길을 걷고 있다.


집에서 가까운 높지 않은 산들은 베라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 베라는 이제 제법 산을 잘 탄다.

하긴, 개에게 3개월이란 사람의 3개월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다. 그 사이 코로 눈으로 두 다리와 발바닥으로, 몸통에 스치는 풀잎 들의 움직임으로부터 배운 것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베라가 눈 뜬 순간부터 한껏 오른 흥을 구경하며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움으로 시작한 이른 아침은 어떨 땐, 조금 느긋하게, 어떨 땐 단출히 늘 비슷한 모습으로 시작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푹 자고 맑은 얼굴로 일어난 날도 있었지만, 고민과 불안에 밥이 안 들어가고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더욱이 아침 산책을 챙겨 나갔다. 그러면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것이 얹힌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 아침은 조금 허기가 졌다. 커피를 내려 한모금하고 어제 보경님이 정성스레 동거인과 자신을 위해 만든 고운 유부초밥을 나눠주신 것이 생각나 하나 꺼내 물고 천천히 씹었다.


축축하지 않고 적당히 포슬 하게 맛이 밴 유부, 우엉, 무절임, 톳과 함께 단단히 뭉쳐진 흰쌀밥이다. 아주 조금 느껴지는 초와 간장의 맛, 씹을수록 나오는 우엉의 땅 맛과 향, 유부의 고소함, 오돌토돌 씹히는 무 절임의 조화가 아주 섬세하다. 단 맛, 짠 맛, 고소한 맛, 새콤한 맛, 식감 어느 하나 자신을 주인공이라 주장하지 않고 슴슴하게 어우러져 모두를 잘 살린 유부초밥이었는데, 유부 안에 밥을 꽉 채워 넣지 않은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입구 부분은 일부러 조금 남겨두어 모두 베어 물었을 때, 밥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절한 수준이어서 감탄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문자를 보냈다.


'보경님, 넘 맛나요. 우엉과 유부와 쌀을 이렇게 멋지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는 훌륭한 유부초밥이다.


지난 쉼에 대한 이유를 늘어놓는 것이 어쩐지 변명처럼 느껴져 델리숍 방학 공지에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매일매일 SNS에 운영 공지를 하고, 무언가를 보여주고, 관심을 모으고, 끊임없는 질문에 응답하는 일들에서 꽤나 지쳐있었던 것을 안 것은 '우선멈춤'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보내며 곰곰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싫은 것이 많은 이 상태를 들여다보면서다.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당장 필요한 것이 정말로 쉼인지조차 모르겠을 그런 날들이었다. 쉬면 왠지 계속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어디서 오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떤 인정을 놓치지 않고 유지하고 싶은 마음, 계속해서 건재함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생활이 남을 대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에서는 되려 멀어지게끔 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음식을 하는 데에, 하고 싶은 것을 아는 데에, 가장 필요한 호기심과 나누는 마음이 점점 바닥나고 있단 걸 알고 불안감이 점점 더 불어났다.


그런데, 이 유부 초밥을 씹으며 생각한다.

매일 빠트리지 않고 일어나 그냥 걷는 산책길인데, 눈과 코에 가득 담기는 계절의 변화와 아름다움에서도 생각이 난다. 작고 슴슴한 유부초밥의 단단함에서 느끼는 감동처럼, 무언가가 이렇게 멋지다는 것을 굳이 증명하고 설명해내지 않아도 되는 삶, 일부러 낸 구멍 사이사이로 들어차는 바람처럼 스물스물 몰려오는 많은 일들에 전부 응답하지 않고, 다 해내지 않아도 되는 삶, 아침에는 눈을 떠 작고 따뜻한 숨 쉬는 존재를 쓰다듬으며 안도하고, 커피를 마시며, 잠에서 깨고 정신이 드는 찬 바람을 맡으며 산책을 하고, 오늘의 할 일이 있는 작업장에 나가 차분히 준비해 제시간에 일을 끝내고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와 씻고, 따뜻한 침구에 들어가 책과 여러 뉴스에 귀 기울이며 하루를 마감하는 단순한 삶이 여기 있다.


유부초밥과 베라

조금 진부한 표현이지만, 길고 투명한 물컵에 물이 반쯤 있다면, 나는 그 물의 수위를 8부까지 따라야 딱 보기 좋은 모양새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8부까지 물을 따르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에게 부탁할 일들을 촘촘히 구성하고 요구하곤 했다. 시원하게 따른 컵 안의 물을 맛있게 마시는 사람은 나도 동료도 아니었지만 이 일의 아주 기본적인 자세가 나 아닌 남을 위함이라 생각해 시원하게 마시는 상대를 보며 기뻐했다. 상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었지만 그것보다 돌봐야 할 것이 더 많은 상황에서 나는 늘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운영자였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다른 곳의 기준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오만이었다. 가장 불편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많은 노고와 성취를 뒤로 하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어느 정도의 선을 분명히 그어야만 하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루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아무것도 모르겠다. 애초에 얻는 것을 생각하니 잘못된 일 같기도 했다. 여전히 모르는 구석으로 남아있지만, 사업에서 나의 만족을 위해 남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태도는 가장 피하고자 했음에도 절대 피할 수 없는 불문율처럼 되었다는 점이 "일단 멈춤"에 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반드시 '너만 힘든 것이 아니고 나도 힘들어'라는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다.


안으로 안으로 모이는 사색을 다시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것.

조급해하는 것들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 채우는 것.

작고 따뜻한 생명에게서 매일 배우는 바에 애정을 쏟는 것.

가진 것에서 부족한 것을 찾아 채우는 것이 아닌 지금 있는 것, 누리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것.

매일 살아내는 대단함과 고마움을 뒤틀린 시선이 아닌 그대로 보는 것.

같은 어쩌면 하기 쉬운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

간결한 사고를 유지하며 할 수 있는 것을 충실히 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단단함과 적당함을 가져 감동을 주는 유부초밥처럼 그저 매일의 매 과정을 충실히 하며 사는 것은 평생의 숙제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어쩐지 조금 맹물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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