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퇴근했지만 머리는 미처 퇴근하지 못할 때가 많다. 몸이 말을 타고 너무 빨리 달려서 뒤쳐진 영혼이 도착할 수 있게끔 잠시 기다려준다는 인디언의 이야기처럼 서둘러 가방을 챙겨 몸은 빠져나왔지만 정신은 아직 못 끝낸 일, 내일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한다. 퇴근 후 요가를 가기 전에 비는 1시간여 동안 근처 공원 벤치에서 멍을 때려도 보고 음악을 듣거나 넷플릭스를 보다가 산책도 해보지만 쉽사리 머리에 난 쥐는 풀리지 않는다. 머리를 비우기 위한 이런저런 시도 때문에 퇴근해서 요가원으로 가는 길은 매번 달랐다. 회사에서 요가원 사이에 있는 길을 1년 8개월 동안 일부러 방황한 셈이다. 그러나 요가를 하고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같다. 방황할 필요가 없다. 10미터는 족히 넘는 키 큰 은행나무들이 쫙 깔린 길.
요가가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요가원 첫날이 생각난다. 그냥 근처 요가원에 1회 체험이나 하러 가보자 해서 요가매트도 요가복도 없이 헬스할 때 입을 법한 헐렁한 옷을 입고 무작정 방문을 했었다. 다들 어찌나 몸이 유연하고 힘도 세던지, 헬스장 요가 GX 수업에서는 항상 상위권에 들던 나는 90분 동안 어느 한 동작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발목을 쓰는 운동은 아파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 선생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수련생을 보지 못하셨는지 '혹시 발목 수술하셨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신기한 건 내가 처음 간 그날은 요가원 창립 이래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수련생이 온 날이었다. 옆사람 매트와 내 매트의 간격은 손가락 두 마디밖에 되지 않았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몸의 움직임에 온 집중을 다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어두컴컴한 방이라는 공간이 너무도 생경해 몸은 아파서 죽겠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요가 수련을 시작한 지는 2년이 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한 휴강으로 수련기간은 실제로 1년 8개월로, 처음 요가를 시작할 당시 코로나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고 마스크도 쓰지 않던(!) 시기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던 사람들이길래 이렇게 다 요가를 잘하는 거지'. 그렇게 첫날 수업이 종료되고 마지막 사바사나 때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땐 마치 낮잠을 너무 푹 자고 일어나서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인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비몽사몽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을 꿈뻑이며 요가원을 빠져나왔을 때 은행나무 길이 보였다. 이제껏 적어도 200번은 지나갔던 그 익숙한 길에 난생 처음 놓여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머리가 적막하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머리가 적막하다고? 아마 한 번이라도 브레인 채터링*이 멈춘 걸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수다스러운 녀석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살고 있는지. 머리가 조용하니 세상이 적막했다. 그때 차 한 대가 지나갔다. 고요한 적막 속에 오직 차 소리 하나만이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옷에는 바람이 불어왔고 소름이 돋았다.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이었다. 굉장히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 순간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태어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요가를 기점으로 마치 전생과 현생만큼 이상하리만치 멀고 분명한 시간의 단절이 있었다. 보통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까지 하루가 이어지고, 그날 밤에 아침을 회상하면 같은 날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 순간은 그날 아침이고뭐고 오직 지금밖에 없었다. 그렇게 낯선 '현존'의 감각으로 그 은행나무 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Brain chattering. 머릿속에서 생각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서 나온 말. 단편적으로 맛있는 케이크를 보고 '아 맛있겠다. 먹고 싶다. 그런데 밤 9시가 넘었는데 참아야겠지? 근데 내일은 아침에 먹을 시간이 없는데.' 등등 계속 생각이 이어지는 것.)
대답이 너무 길었지만, 요가가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보면 그 첫날의 은행나무 길이 생각난다. 내 삶을 이루는 번뇌, 감정, 집착, 욕망, 불안이 속삭이는 소리가 사라진 순간에 비로소 눈앞에 있는 것들이 생생하게 실재하더라 라는 걸 처음 목격한 날.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건 'Here and now'에 있을 뿐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잊어버리기에 요가를 하러 간다. 요가로 삶에 영점 조절을 하러 간다. 그리고 이젠 그 은행나무길을 1년 8개월째 걷고 있다. 봄여름가을을 두 번씩 봤고, 이제 두 번째 겨울이다. 굳이 계절이 바뀌지 않아도 매일매일이 다르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길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목격했다. 나무도 매년 똑같은 모습이 아니다. 오늘의 은행나무는 오늘뿐이다. 내년 이맘때라도 똑같진 않을 것이다. 주어진 날씨가 매년 똑같다고 해도 나무는 살아있다. 나무가 지나온 시간과 겪은 사건들은 나무의 몸에 남는다.
아무리 목이 말라 내일 먹을 물까지 오늘 먹었다고 내일 갈증이 없을 수 없다. 요가를 통해 배운 것은 지금만 할 수 있는 게 있고 해야 할 게 있다는, 지금 최선을 다했다면 다음번 기회로 넘길 줄 아는 '지금의 몫'이다. 성격이 급한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을 끝을 볼 때까지 쉽사리 놓지 못했는데 지금 과도하게 무리하면 반드시 몸이 탈이난다는 것, 그렇다고 대충 하면 다음엔 더 큰 아픔이 찾아올 거라는 걸 요가를 통해 배웠다. 끊임없이 흐르는 것 같은 시간에 멈춤 버튼을 누르고 '지금 집중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과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요가가 알려줬다. 그래서 요가는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삶의 영점조절을 나는 요가로 하고 있고, 그건 지금 한번 잘했다고 영원히 안해도 되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해야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