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이름 말고

소라게가 나보다 낫더라니까

by 아람

부서지는 파도 끝자락에서

영 벗어나지를 못하고

끝도 없이 송두리째 구르는

소라게를 본 적이 있어.


파도는 쏴아아ㅡ

소리를 내며 밀려와서

내가 못내 어렵게 적어둔 이름 석 자,

그리고 연이어 찍은 마침표까지


별 일도 아니란 듯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단번에 쓸어 가더라


소라게는 온 생명을 다 휩쓸리며

영영 구르더라도 어쨌든 살아내.


나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얘, 너의 자리로 가거라

하며 파도가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줬어

어지럽지도 않은가 언제 그랬냔 듯이

어디론가 뽈뽈거리며 사라지더라


나도 그 소라게처럼

누군가 한번만 손 내밀어주면

좋아질 것도 같은데


지금은 온 마음을 다해

이 파도가 나를 다 쓸어가기를 바라면서

모래사장 위에 네 이름 석자 쓰는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야


마음에 새겨진 것들도

파도가 다 쓸어담아

저 멀리 데려다 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엔 네 이름 말고

사뭇 다른 것들을 적어 볼까 해


아직 오지도 않은 날들을 먼저 살아버리는 습관, 걱정

나를 나로 붙잡을 아무것도 없는 시간, 불안

네가 아닌 것들에서 자꾸만 너를 찾는 일, 그리움

어쩌면 그 모든 마음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를, 사랑




아람|writing from the undertow.

© Written by Aram.thewav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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