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실제 이 손 자체, 이 신체 전부가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마치 내가 미치광이들과 한패가 되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들은 검은 담즙膽汁으로부터 올라오는 악성의 증기蒸氣로 인해 뇌가 몹시 어지럽혀져 있기 때문에, 빈털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제왕帝王이라고 한다든가,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라색 의복을 걸치고 있다든가, 자기의 온몸이 호박이나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라든가 하고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氣가 어긋나 있는 것이며, 만일 내가 그들의 예를 흉내 내든가 하면 나 자신도 그들 못지않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데카르트, 『방법서설(성찰, 세계론)』, 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8, 109-110pp.)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세. 이는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일종의 광기다. 코기토에 이르는 회의는 광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코기토Cogito는 ‘생각하다’는 뜻의 라틴어로 사고하는 ‘나’를 뜻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데카르트는 생각하고 의심하는 ‘나’를 존재 주체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한 ‘나’를 찾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광인들의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보인다. 나는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지만 이러한 경험적 사실조차도 사실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장자가 말했듯이 내가 지금 여기에 처한 상황은 나비가 꾸는 꿈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언뜻 듣고 보면 사람들은 나를 미치광이처럼 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광적인 회의와 진리에 대한 열망을 떠올릴 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떠오르는 철학자가 있다. 그것이 바로 니체다.
앞서 말한 이러한 과장된 회의, 즉 광기는 니체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자세와도 언뜻 비슷해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슨 존재인가. 니체는 이런 질문 너머에는 우리가 선악에 대해 갖는 편견과 관습이 우리를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 노예로 규정하고 있다는 진실을 발견하고 있다. 이런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조차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탐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저자 서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11p.)
니체가 문헌학자인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문헌학자인 니체는 현재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자체에 감화되고 체험해야만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니체가 진단한 지금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니체는 전에 있던 자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을 겨냥한다. 바로 <도덕덕 편견의 기원>이다. 그는 “도덕을, 다시 말해 이제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 온 모든 것을 의심한다.”(15p.) 나 자신, 그러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선 그 도덕의 계보를 파악해봐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인간은 어떻게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고안하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도덕이 곧 동정이라 하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을 니체는 거부한다. 도덕이 만약 동정이라면 도덕은 위험한 것이다. 동정은 허무주의로 이끄는 새로운 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동정은, 즉 감정의 유약화는 수치스러운 현상이다. 니체는 이 문제, 동정과 동정의 도덕이 갖는 가치라는 문제에 직면할 때 기존에 주어진 것들을 비판하게 될 새로운 요구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도덕의 문제는 결국 선악의 가치로 직면하게 된다. 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높이 평가되어 왔는가? 니체는 마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우리에게도 권선징악의 문제는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사람은 니체 이후 시대의 증상 때문인지 유약한 사람으로 평가될 때도 있다. 선하기만 한다면 그저 남들 말에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순응하는 약자에 불과하다는 인식 말이다. 선하면 손해를 본다, 남들을 도와줘봤자 그 사람의 손해일뿐이다. 이 모든 것이 니체의 영향이라면 니체를 원망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원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악의 인식이 뒤흔들어진 마당에 우리는 악을 숭상해버리는 실수를 저질러버린 것이다. 니체가 악을 긍정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기존의 선악의 개념이 무엇이 문제인지 직면한 철학자다. 우리는 니체가 부수어버린 관념을 흔드는 것을 넘어서 그 개념들 위에 새로운 정초를 쌓아야 한다.
이 가치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왜 기존에 잠들고 있고 전혀 문제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건드려봤자 무슨 이득이 되는 것일까? 니체는 말한다.
“나에게는 그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보다도 더 보람이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보람 중의 하나는 예를 들면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문제들을 명량하게 취급할 수 있게 될 것이란 점이다. 이러한 명량함 – 내 식으로 말하자면 즐거운 학문 – 은 하나의 보상으로, 이것은 오랫동안의 용감하고 근면하고 남모르는 진지함, 물론 몇몇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진지함에 대한 보상이다.” (24p.)
하지만 이 문제에 직면하기 이전에, 니체의 책에 직면하기 이전에 니체는 소소한 경고를 던진다.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독자들은 거의 소가 되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현대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한 가지 일이란 되새김하는 것이다.”(26p.) 고전이란, 계속해서 소처럼 곱씹어야 하는, 우직한 자세로 밀고 들어가야 하는 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