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부터 손이 바지런해야 계절의 결실을 먹을 수 있다. 무화과에 망을 씌워주지 않으면 새들이 날아와 남김없이 쪼아놓는다. 자두도 마찬가지다. 가지, 호박, 각종 나물도 말려놓아야 하고, 오이도 제 때 따서 오이지를 담가야 무르지 않고 오랫동안 아삭거린다. 토마토도 부지런히 거두어 토마토 페스토를 만들어 보관한다. 우리 집 제일 늦는 과일은 참외다. 패션쇼에서 그 계절 가장 예쁘고 중요한 옷이 맨 마지막에 등장하 듯 노란색 달덩이 마냥 큰 참외가 누렇게 앙상해진 가지에 매달려 당도를 높이고 있다.
참외를 한두 개씩 따먹다 서너 개도 먹을 수 있게 되면 가을이다. 가을은 마지막 참외를 떨구고 입성한다. 가을이 되면 밭에는 한 줌의 파와 가을바람에 누더기가 된 깻잎만 남는다. 그러나 진짜 신기한 건 땅 속에 있다. 비트루트가 빨갛게 익어가고 돼지감자가 해바라기 같이 큰 꽃대 밑에서 점점 풍성해 지고 있다. 위에는 시들고 말라버려 죽은 것 같은 더덕도 겨울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 썰렁해진 밭을 호미로 뒤집으면 흙이 따뜻하다. 뿌리 식물을 품고 있는 기운이다. 농부들에게 가을은 황금벌판이겠지만,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가을은 따순 흙이다. 겨울을 견디고 봄을 건강하게 맞이하라고 닭똥 소똥 퇴비를 주고 흙을 뒤집는다.
나에게도 인생의 가을이 왔다. 그냥도 가을이구나 알만 한데 관절염과 흰머리로 확정한다. 산에는 단풍, 내 머린엔 벌써 첫서리. 세월은 공평해서 은혜롭다. 공부하랴 애보랴 바빴던 인생의 여름날보다 겉으로 보기는 황량해도 헐거운 이 시간들이 좋다. 아이들도 엄마 손을 떠났고, 혹은 내가 떠나보냈고, 나를 위한 시간이 좀 더 많아졌다. 그래서 텃밭의 땅 속처럼 내 마음에 담겨있을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말라비틀어져 비루하지 않기를. 윤기 자르르 만천하에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되더라도, 겨울을 넘길 만큼은 실하기를 조용히 바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