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한강의 꿈, 호기심의 물결
나는 항상 이 세상의 끝이 어딘지 궁금했다. 끝이 있다면, 그 끝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시골 마을에 살며 20살이 될 때까지 서울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꿈속에서나마 서울을 여행했다.
내 꿈속의 서울은 물이 가득한 강이었다. 나는 그것이 한강임을 직감했다. 찰랑거리는 물결과 힘 있고 푸르다 못해 시커먼 깊이 요동치는 한강을 강둑에서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묘한 떨림을 느꼈다. 이상한 것은,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옆에는 아버지도, 친척 어른도 아닌 한 노인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그 노인의 온기는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성장한 나는, 엄마가 46살에 나를 낳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나이부터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나는 인문대학을 졸업하고 동해안의 아름다운 동산 아래에 위치한, 한 여자 고등학교에서 외국어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관심은 철학, 종교, 자연과학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 세상의 끝과 그 너머에 대한 끝없는 의구심은 나를 새롭고도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교사직을 멈추고 사상가로 변신해, 최근에는 '세계를 재해석하는 삼중주: 철학, 과학, 종교'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제 나는 이 세계가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나는 저승에 가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심지어 마르크스까지 만나 이 세계가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에 대해 대담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에게 세계를 허위조작한 범죄를 묻고 재심을 청구하고 싶다. 그들이 주장하고 시행한 유물론에 의하여 이 세계는 물질적 세계관으로 가득 찼고, 그로 말미암아 전쟁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칸트와 그 무리들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철학적, 과학적, 종교적 교리 저변에는 의식, 즉 보이지 않는 지식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 세계는 이 지식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제국이며, 이를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비로소 전쟁이 멈추고, 불행이 멈출 때까지 나는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 내 생애를 바칠 것이다. 물질은 가상이며, 실재는 의식임을 명백히 알려야 한다고 다짐한다.
칸트와의 만남
영철이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칸트의 영혼을 찾았다. 어느 고요한 저녁, 그는 칸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영철: "칸트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많은 자극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철학은 어렵기로 유명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몇 년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인식론, 특히 '현상계'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이 세계가 오직 현상계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실, 물자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현상계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고, 이 세계는 의식이 만든 세계인데, 그 외의 세계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칸트: "맞아요, 정확한 표현입니다." 나도 사실 그 당시는 물자체세계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소. 그러나 지금 내가 저승 사람이 된 이후, 물자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소.
영철: "여기서, 저가 선생님이 말씀하신 현상계를 해석함에 있어서 의식이나 인식이란 단어를 혼용해서 씀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인식과 의식을 혼용해서 쓰는 것을 허용 받고 싶습니다.
칸트: "그래요, 인식보다 의식이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죠. 그러나 큰 의미에서 혼용이 가능할테지요"
영철: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현상계를 냉철히 분석하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가 곧 현상세계이고, 실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재의 세계는 현상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의 몸, 나무, 꽃 등을 개념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죠. 사람의 몸은 물과 단백질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세포로, 세포는 분자로, 분자는 원자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그것은 다시 쿼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광전자의 발견으로, 우리는 빛을 통해 사람의 몸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게 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실재와 현상 사이에 있지만 실재를 인식하지 않고, 현상을 인식하고 있죠." 현상은 곧 가상이라는 말과 연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 "정확합니다. 내가 주장한 현상계는 가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철씨는 내가 주장한 것보다 더 쉽고 냉철하게 현상계를 분석하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영철: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현상계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런 분야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칸트는 그의 후배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칸트: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려."
영철: "선생님의 현상계는 비물질적, 의식의 세계를 지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현상계는 인간의 의식이 이끄는 세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의식이 없으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칸트:맞습니다. 현상계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식의 현현으로 나타난 가상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가상세계는 인간의 의식이 현현한 것이므로 의식이 없으면 나타나는 것도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현상계는 물질 세계를 부인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학은 인간 중심, 특히 인간의 의식이 중요시 되는 학문이 되고, 그렇다면 인간 세상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겠죠.
영철:그런데 선생님의 이론에 반기를 든 이가 있었죠. 이 오류를 범한 학자가 바로 선생님의 후배인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선생님의 관념의 세계를 다시 물리적 세계로 전환시켰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생겨났고, 또 그로 인하여 세계 전쟁들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은 물질주의의 패단으로 나타난 것이죠.
지구촌 즉 인류세계는 그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전개되어왔습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죠. 이제 저는 선생님의 철학을 이 세계에 깊이 있게 세워 인간 중심, 인간의 정신이 중심이 되는 세계로 전환을 유도하려 합니다."
칸트: "너무나 훌륭해요. 나의 후배요, 후손이요."
영철: "감사합니다. 이제 이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하여 변화해야 인류가 살아남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다음에는 물자체 세계에 대해 대담을 요청합니다."
칸트: "알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영철의 깊은 고뇌
칸트 선생님과의 대담 후, 나는 세계가 현상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동의를 얻었다. 그 순간, 현상계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인식과 의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창조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인식과 의식이 인간 외에 존재할까? 식물이나 동물들도 의식이 있을까? 이 질문의 해답은 의식의 기능적 범위와 질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과연 식물과 동물도 칸트의 인식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식물이나 동물이 자신에게 의식이 있는지 질문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 우리는 식물과 동물의 의식을 궁금해하지만, 그들도 우리의 의식을 궁금해할까?
결국 이 질문들은 모두 인간의 의식 안에 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다루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인식이나 의식 안에 들어왔다는 신호다. 즉, 식물과 동물에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은 인간의 인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현상계가 우주 자체라면, 만물도 현상계이며, 모든 자연도 현상계다. 이것은 곧 우주가 나의 의식이 만든 세계라는 엄청난 발견이다. 우주는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칸트선생은 우리가 현실로 생각하는, 외부 자연을 구성하는 시간, 공간, 그리고 개념들을 12범주로 묶고, 그것들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우리의 보이지 않는 의식이 외부 세계를 창조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 말은 곧 우리 자신 곧 내가 이 세상을 만든다는 표현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꿈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꿈과 현실의 차이는 무엇일까? "꿈은 하룻밤을 꾸나 현실은 한 평생을 꾼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무의식은 꿈을 만들고, 의식은 현실을 만든다. 무의식과 의식의 차이는 잠잘 때 의식이 무의식으로 변하고, 깨어날 때 무의식이 의식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삶과 꿈의 공통점은 모두 꿈이라는 것이며, 차이점은 꿈이 짧거나 길다는 것이다.
삶은 곧 꿈이라고 되뇌며, 나는 삶의 공포와 고통, 아픔이 별것 아니라는 위로를 얻었다. 하찮게 여겨지던 의식이 세계를 만드는 위대한 창조력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 의식은 내 안에 있다.
다시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80년 간 꿈을 꾸고있다면,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우리 현실이 그것을 말해줄 수 있으리라.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이 의식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것이 칸트의 인식론이다. 나도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이 현실이 꿈이라고 생각되지 않지 않는가? 너무나 적나라한 현실로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뿐이다.
그렇게 인식이 우리를 속인다면 꿈이 80년 간, 지속되어도 그것이 의식이 만든 꿈이 아닌 현실로 착각할 것을 명백하다.
만일 현실이 하루 만에 끝난다면 현실은 의식이 만든 가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꿈은 80년 간 지속되니, 꿈이 현실이 되어버릴 것이다.
여하튼, 나는 의식이 꿈과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과 그 꿈과 현실에서 우리는 우주를 느낀다는 점에서 의식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식이 인간 안에 있다니, 그렇다면, 의식이란 단어는 영혼, 정신, 또는 신과 다른 것인가?
단편소설
꿈의 조각
현대인의 삶은 바쁘게 돌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고, 그는 출근 준비에 바쁘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색빛 도시 속을 지나며 그는 오늘의 일정을 생각한다. 삶은 마치 한없이 이어지는 꿈처럼 느껴진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수많은 이메일과 보고서, 미팅이 그를 기다린다. 시간은 흐르고, 하루가 끝나면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도착해 잠에 들기 전, 그는 문득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한낱 꿈일 뿐인가?"
삶은 꿈처럼 덧없고, 현실은 무의식 속의 조각들이다. 그는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꿈 속에서는 현실의 고통과 아픔이 희미해지고, 행복한 순간들이 모인다. 그러나 깨어있는 동안 그는 물질과 돈에 매몰된 삶을 살아간다. 모든 것이 인식과 의식 속에 있는 한, 현실과 꿈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는 삶의 본질을 깨닫고, 물질적 욕망을 내려놓는다. 삶은 결국 꿈이며, 그는 그 꿈 속에서 온갖 욕망에 시달리며 자유와 행복을 찾아 헤맨다.
의식의 항해
얼마 전, 사업이 코로나19로 도산한 후 나는 날마다 빚독촉에 시달렸다. 은행에서, 친구들로부터,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나를 채근했다. 이 인생이 한낱 꿈이라면, 이 꿈은 참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중얼거리지만, 현실의 괴로움에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의식의 현현이라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죽는다는 것일까? 생과 죽음의 의미를 고민하며 나는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의식이 물질도 아니고 돈도 아닌데, 왜 이 세계는 지옥같고 악몽의 늪 같은 것인가? 나의 의식이 지옥으로 설계된 것인가? 타인의 의식도 나와 같은가?
의식은 모두 같은 것인가? 의식에도 선과 악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악의 의식의 장에서 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선의 의식의 장에서 살 수 있는 날도 올까? 지옥이 지금이라면 내일은 천국일까? 이 질문들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고통의 바다에서 울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통당하지 않는 세상을 믿는다. 이 세계는 물질과 돈이 본질이 아니기에 나는 우리가 거대한 의식의 바다, 즉 의식의 장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 의식이 이끄는 꿈이라면, 언젠가 의식이 바뀌어 선몽을 꿀 날이 올 것이다. 그 꿈 때문에 나는 이 고통, 이 아픔, 이 애통을 견디며 산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의식의 항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노를 저어 그 꿈을 찾고 말리라.
칸트와의 두 번째 만남
영철은 다시 칸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는 저승의 문턱에서 선생님을 마주했다.
"선생님, 지난번 현상계에 대한 대담은 정말로 의미 있었습니다," 영철이 말했다. "나도 그랬네," 칸트가 따뜻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번 대화의 제목을 물자체에 대한 재해석으로 삼았다. 영철은 선생님께 이를 알리며, 자신의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감히 대선배이신 칸트 선생님의 물자체를 반박하고 부인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영철이 사과하듯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철학은 인류의 행복과 평화, 진정한 진리를 찾는 운동이네.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지," 칸트가 답했다.
영철은 칸트가 물자체를 부인하지 못하고 인정한 이유를 물었다. 칸트는 주변의 공간과 물질들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며, 그것들이 인식의 소산물이라고 단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영철은 이에 동의하면서도, 세계가 실재와 가상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실재는 숨어 있고, 우리는 가상만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지구가 돈다"는 명제를 예로 들어, 실제는 지구가 도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느끼지 못하고 정지된 지구를 볼 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세계관은 보이는 대로의 세계관에 집중되어 있지요. 그래서 보이는 현상계는 가상이며, 이 현상계의 실재는 의식입니다," 영철이 말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의 피부와 입술과 가슴이 사실은 빛의 춤이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영철의 논리에 감탄하며, 물자체란 외부에 있는 물질세계 전부를 가리킨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물자체의 실재가 빛의 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자신의 오류를 깨달았다.
"영철씨, 당신의 주장이 맞소.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의식이 만든 나의 신체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소," 칸트가 말했다.
영철은 주관과 객관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착각을 설명하며, 주관과 객관이 모두 관객의 인식에 의해 현상계가 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물자체도 현상계에 포함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참으로 대단하오. 당신의 분석은 정말 훌륭하오," 칸트가 영철을 칭찬했다.
영철은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나눴다. 그는 우주가 우리의 의식에 있다는 점에서, 우주의 시작과 끝의 의미가 사실상 없어지며, 의식이 시작과 끝을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우주는 의식에 의하여 결정되겠네," 칸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주가 물리적이라면 우주의 끝도 시작도 정확히 정의되겠지만, 우주가 우리의 의식에 의한 우주라면 우주의 시작과 끝의 의미는 없어지죠," 영철이 말했다.
"영철씨를 만나 참으로 행운이었소. 많이 깨달았소," 칸트가 고마움을 표했다.
"선생님,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영철이 답했다.
깊은 고뇌 속의 하루
칸트와 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의한 후,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늘도 나는 이 세상의 공간과 물질 속에서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며 일상을 보냈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갈등도 있었고, 물질에 관한 욕심으로 다툼도 있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친한 사람과의 요원해진 관계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내 자식,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이 있지만, 이 괴로움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현대사회는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내일이 찾아올 희망이 없다면 한 시간도 버틸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내일이 오면 다시 그 내일은 그다음 내일로 미뤄질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이 세상은 물자체가 없는 인간의 의식의 세상이라는데, 왜 이런 가상의 세계에서 삶은 가상이 아닌 물질과 경제의 고통이 밀려오는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물자체의 세상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이 의식의 세계가 고장 나서 그런가? 나는 종교 세상을 생각해본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고해의 바다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도 이 세상은 마귀가 침범한 세계라서 고통과 죽음이 따르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가 되면 구원의 때가 온다고 한다. 그 구원과 의식은 어떤 관계일까? 의식의 세계를 나는 '의식장'의 세계로 이름 붙여 보았다. 이 세계가 의식장의 세계라는 것은 이 세계가 모두 정신의 세계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이 물질이 아닌 정신 세계라는 것이 곧 인식론에서 현상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고통과 불행은 곧 지금 정신세계에 문제가 있음을 극명하게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에는 도피안이란 말이 있다. 이쪽 강가는 고통의 바다이니 이 강을 건너서 저 강으로 건너가면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신세계라면, 이 세상의 진단은 다시 종교로 가야 한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왜일까? 그들이 핵심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일까?
의사가 병을 고칠 수 없으면 그 병원은 쓸데가 없을 것이다. 종교는 왜 그 역할을 못하고 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종교에는 왜 그렇게 관대할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현상계로, 정신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정신과 정신세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고통을 없애는 세상을 찾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도 고통으로 하루를 보낸다.